미국은 태생적으로 이민자의 나라였다. 17세기 유럽에서 건너온 청교도 이민자를 시작으로,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흑인 노예, 19~20세기에 들어온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이민자까지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모여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다인종적인 사회를 이뤘다.특히 1965년 이민법 개정 이후 다문화 사회는 급속히 확대되었고, 미국은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기회의 땅’이라는 상징성을 갖게 됐다.한인 이민사 역시 이 흐름 속에 있다.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시작된 한인 이민은 2~3세대를 거치며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뿌리내렸다. 미국의 교육 기회와 경제적 환경을 활용해 성공을 일군 수많은 사례는 아메리칸 드림이 허상이 아님을 보여주었다.흥미로운 점은 보수주의의 아이콘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조차 아메리칸 드림의 확장에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86년 이민개혁법(IRCA)에 서명하며 불법체류자 약 300만 명에게 영주권을 부여했다. 이 조치는 미국의 문이 여전히
가을이 주는 첫번째 이미지는 풍요로움이다. 한 여름 땀흘려 일한 댓가로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이를 거둬들여 풍성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추석부터 서양의 추수감사절까지 어디나 이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그래서 나온 말이다.한자로 가을을 뜻하는 ‘추’는 벼 화자와 불 화자의 합성으로 돼 있다. 불을 피워 햅쌀로 밥을 해 먹는 것이 가을의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우리말의 ‘가을’도 어원을 따지면 ‘거둬들인다’에서 왔고 영어를 포함, 게르만 언어권에서는 추수를 뜻하는 ‘harvest’가 가을이라는 뜻으로 쓰여 왔다. 상업 혁명과 산업 혁명이 일찍 진행돼 농사의 중요성이 줄어든 영국은 이것이 16세기부터 ‘fall’ 또는 ‘autumn’으로 대치됐지만 독일에서는 아직도 가을을 ‘Herbst’라고 부른다.그러나 가을에는 이런 풍요로운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fall’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가을은 또한 추락의 계절
LA 시의회가 한인타운 6가 일부 구간을 보행자 전용으로 만드는 시범 프로그램을 통과시켰다. 시의회 산하 교통위원회에서 승인된 데 이어 본회의에서도 반대 없이 가결되면서, 당국이 놀만디 애비뉴와 사우스 캐탈리나 스트릿까지의 6가 구간이 주말 동안 ‘차 없는 거리’로 바꾸는 프로그램을 조만간 시행될 예정이다.특히 이와 함께 주민들과 기타 이해 관계자, 연령, 인종, 성별 등 다양한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 및 의견 수렴도 진행한다. 영구화를 고려하기 위해서 인데, 해당 구간을 ‘오픈 스페이스’(공공 여가 공간) 또는 작은 공원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본회의 통과 전인 11일까지 시의회에 총 28건의 공식 주민 의견이 접수됐는데, 영향을 받는 인구를 고려하면 소수지만, 이를 기반으로 현재까지 흐름은 찬성이 많다는 것이다. 28건 중 반대는 1건에 불과했다. 이는 법적인 효력은 없지만 참고자료로 쓰일 수 있다.그러나 이같은 사안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시의회에 공식 주민 의견을 접수하
참 황당한 제목이다. 자기가 피카소의 할애비라니? 이런저런 신간 서적들 틈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표지와 제목이 있어 집어 들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현대미술의 권위 그 자체인 피카소를 감히 자기 손자라며 내가 그의 할애비라고 자처하는 도발적이고 역설적인 그 당당함은 허세일까, 뻔뻔함일까? 잠시 웃음이 나왔다. 어쩐지 허풍스럽고 그러나 기막히게 자유로운 선언 같기도 했다. 독자들에게 황당함을 주는 제목이다. 일단은 한번 보자며 책을 사려했는데, 그건 누가 이미 맡아논 책이라고 해서 주문만 하고 돌아왔다. 1,2 주가 걸린다고.지난 7월 29일 한국일보 H 매거진 최영준의 인생만평 란에 ‘남김’이라는 짧은 시와 수묵화가 눈에 들어왔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둥지 두 개/ 당신을 위해 남겨두었어요/ 춥고 외로울 때/ 삶에 지쳐 힘들 때/ 언제든지 찾아와 편히 쉬세요.”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큰 나무에 검은 둥지 두 개가 눈에 띄는 수묵화였다.나는 화선지 위에 붓으로 그 짤막한 시를
1980년대 고교 3년 동안 잠실의 학교까지 버스 타고 다녔다. ‘100번 버스’였다. 경기 성남시에서 출발해 복정동, 가락동, 송파를 거쳐 잠실을 오가는 노선이었다. 그때 버스는 지금과 달랐다. 동력원부터 달랐다. 청정연료(LNG) 혹은 전기버스까지 등장했지만, 40년 전은 시커먼 매연을 내뿜는 경유 버스였다. 결정적 차이는 안내양이다. 지금은 신용카드로 자동 결제하지만, 당시는 현금 혹은 토큰·회수권을 안내양에게 직접 건넸다.■ 힘든 시절도 되돌아보면 추억으로 남듯이, 기억 속 80년대 시내버스에는 낭만이 있었다. 연장자나 아이 업은 엄마 등 노약자가 타면 즉각적 자리 양보는 기본이었다. 심지어 30대 회사원에게 10대 고교생이 양보하려는 때도 있었다. 좌석 승객은 서 있는 이의 짐을 받아주는 게 거의 의무였다. 상습적 무임승차가 아니라면 ‘다음에 탈 때 내라’는 배려심 많은 안내양도 있었다. 손님과 안내양의 호감이 로맨스로 이어지는 경우도 목격했다.■ 하지만 추억을 떨어낸 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