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빛으로 낡은 1991년도 한국일보 영문판을 훑어보면서 “다음번 화재?”라고 외치는 꼭대기 헤들라인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사우스센트럴 및 인근 코리아타운이 나흘간 밤낮으로 화염에 휩싸이기 1년전이었다.
오늘날의 LA한인타운은 옛말대로 어두운 폭풍을 기꺼이 잊어버리는 ‘우물안 개구리’와 같다.
한풀이의 국민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쉽게 잊을 수 있을까?
언젠가 똑같이 겪었던 일인듯 낙담하게되고 속이 아파진다.
8년이 지난 후, 비록 다수의 한인 이민자들이 지하 인생으로 새벽부터 밤늦도록 끝없는 생존에 냉철하게 종사하고 있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우물안 개구리의 좋은 시절이 계속되고 있는 것같다.
“다음번 화재”라고 외치는 게 바람에 대고 속삭이는 것이거나 또는 메아리 없는 방에서 소리치는 것 같다.
4.29 폭동 1년전, 라타샤 할린스 비극 이후 신문 사설은 ‘두려운 시기’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 땅의 영어를 모르는 한인들은 언론이 부추기는 또 다른 인종 화재에 대비되어 있는가?
“이러한 들끓는 시기에 두려움과 소외감에서 벗어나고 아프리칸 아메리칸 커뮤니티와 좋은 가교를 건설하기 위해 한인 커뮤니티가 활용할 수 있는 최선의 자원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한인 사회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뿔뿔이 조각나고 고립돼있다.
“미국 교육을 받은 전국의 수천명 전문직 종사자들이 법률, 의학, 재정, 교육, 과학, 예술, 행정부 분야에서 경력을 쌓고 있으나 이민자 커뮤니티의 생존에 매우 중요한 인종교류 강화에 기여하려 자원봉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4.29 폭동 다음날, 3만명의 동포와 지지자들이 연기나는 한인타운 거리를 행진할 때 신문 1면 사설난에는 상처를 치유하고 또 다른 4.29를 예방하기 위해 마땅히 실천되어야 할 사항들이 쏟아져나와 있었다.
즉 다음과 같은 시급한 과제가 당면해 있다고:
“폭동 피해 한인 상인에게 가해진 폭력과 민권침해에 대한 합당한 수사 요구;
“수천명 폭동 피해자의 재건을 위해 변호사, 의사, 엔지니어, 과학자, 교수 등 가능한 최선의 자원을 가동;
“메인스트림 언론의 편협, 증오, 무지를 타개하기 위한 전국적 명예훼손타파 한인 리그를 결성;
“커뮤니티 지도자 및 운동가 전국회의를 개최, 행정부와 흑인, 히스패닉, 다른 아시안 그룹을 상대할 단기, 장기 전략을 논의해야한다”등등.
LA폭동은 전국에 분산된 한인들을 자각시키고 단결시켰다. 그 직후의 지역적 반응은 약속들로 넘쳐났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쉽게 달아오르고 곧 식는’우리의 분열 성향은 곧 그 추한 머리를 내밀었다. 금방모든 것이 잊혀져갔다.
그리고 아무런 목표와 방향도 개발되지 않았다.
영어를 구사 못하는 동포 이민자들이 긴장감도는 도심에서 생명을 위협받는 위기에 처해있을 때, 수십만명의 미국교육받은 엘리트들의 부재가 눈에 띄었다. 가교역할의 힘든 일을 나누어맡은 ‘훌륭한 극소수’ 전문직종사자의 낯익은 얼굴들만 보일 뿐이었다.
회상컨대, LA에서 한인표적 공격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이에 대항하는 단 한 개의 한인 편지가 LA타임즈 사설난에 게재됐을 뿐이었다. 그 유일한 편지는 사우스센트럴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이민자의 아들인, 한 UCLA 학생이 쓴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1996년의 로스앤젤레스 인간관계위원회 연구조사는 “중국인들과 달리 LA한인 커뮤니티는 상당히 분열돼있다. 결과적으로 한인커뮤니티를 통틀어 대변할 지도자들을 양성시키기가 어렵다”라고 관찰했다.
“커뮤니티에 근거를 둔 강력한 중재기관이 없는 것이 한인들과 여타 로스앤젤레스 주민들과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1992년의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이라는 사설난 게재 이후, 20세기의 태양은 저물어간지 오래다.
그리고 새천년의 첫해는 자비로운 망각의 LA스모그속으로 표류해들어갈 참이다.
“다음번 화재?” 다시금 이미 본적 있는 환각이 되고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