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그레샴의 법칙’은 일상사의 거의 모든 면에 적용된다.
따지고 보면 남가주 주민들에게 불편을 강요한 메트로폴리탄 대중교통국(MTA) 정비사들과 수퍼마켓 종업원들의 파업도 노동시장에 유입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나온 마찰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파업은 경영주의 직장 의료보험 혜택축소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노조의 예상된 실력행사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파업 이후 전개된 노사 협상과정에서 ‘사’측의 자세가 자못 당당하다는 점이다.
특히 ‘양보불가’의 강경입장을 고수중인 수퍼마켓 오너들은 이제까지 종업원과 그들의 직계가족에게까지 회사 부담으로 직장 의료보험을 제공해 왔다면서 앞으로 본인 보험의 경우 주당 5달러, 가족보험의 경우 주당 15달러의 프레미엄을 물리겠다는 우리의 결정은 결코 무리한 게 아니다고 강변한다. 사실 직원들의 가족보험 부담금을 고용주가 100% 지급하는 업체는 국내 대기업들 가운데서도 단 4%에 불과하니, 이들의 주장이 헛소리는 아니다.
앨벗슨, 랄프스, 본스 등 수퍼마켓의 경영주들은 세계 최대의 소매업 체인점인 월-마트를 비롯, 싸구려 직장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동종 업체들로 인해 의료비 부담중 일부를 종업원들에게 떠넘기지 않고선 도저히 경쟁력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직원들의 의료비 보조가 임금에 이어 2번째로 큰 지출항목으로 떠올랐기 때문에 이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험혜택을 끌어내려야 비로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같은 주장은 ‘악화’가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노동시장의 현실적인 상황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더 이상 ‘양화’를 고집할 수 없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지난 2년새 의료보험의 프리미엄은 10년래 최고속도로 상승을 거듭했고, 종업원들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디덕터블은 1,000달러대를 돌파했다. 의료보험 프리미엄은 올해도 14%나 치솟으면서 연 3년간 두 자릿수 상승을 이어갔다. 물가상승률의 6배에 달하는 살인적 증가율이다.
카이저 패밀리파운데이션의 조사에 따르면 2000~2003년새 근로자 가족보험의 연평균 프리미엄은 1,619달러에서 2,412달러로 50%가 인상됐고 처방약의 본인 부담액도 46%에서 최고 71%까지 상승했다. 이로 인해 개인보험의 프리미엄이 가계소득의 16%, 가족 보험료의 경우 수입의 27%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카이저 패밀리파운데이션의 계산이다.
이처럼 의료보험 문제가 서민들을 실질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위축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등장했지만, 기업들은 치솟는 의료부담을 종업원들에게 전가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UCLA의 켄트 웡 교수의 지적대로 ‘경쟁력 유지를 위해 사원 복지를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눈먼 경주’만 열기를 더해갈 뿐이다.
결국 죽어나는 것은 봉급쟁이들이다. 급료는 꿈쩍도 않는데 의료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고용주는 부담전가에 급급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개중에는 회사가 제공하는 가족보험의 프리미엄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만 사용 가능한 싸구려 응급보험을 구입하는 봉급쟁이들이 부지기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고용주의 요구를 전폭 수용한다해도 여전히 썩 괜찮은 베니핏을 보장받게 되는 수퍼마켓 종업원들의 파업이 호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피켓라인을 넘어 샤핑에 나서는 고객들이 부쩍 늘고 있다는 보도 역시 이런 정서와 무관치 않은 듯 싶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론 수퍼마켓 종업원들이 펼쳐 놓은 무력한 피켓라인을 끝까지 존중해주고 싶다. 근로자 복지의 키 높이가 최저수준에서 통일되는 것. 고용주가 투입한 악화가 노동시장에서 단일통화로 자리잡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레샴의 법칙을 깨고 싶다.
이강규 / 국제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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