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풍(女風)’‘박풍(朴風)’‘마돈나 선풍’‘핑크 리더 시대’‘여성 정치시대’…
요즘 한국의 4.15 총선 뉴스를 보면 ‘세상이 변하기는 변했다’는 느낌이다. 선거 뉴스를 전하는 신문이나 TV 화면에 여성의 얼굴이 이렇게 많이 등장하기는 한반도 역사이래 처음이다.
오른손에 대형 반창고를 붙이고 손이 아파 절절 매면서도 쉬지 않고 웃으며 포옹하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화장기 없는 얼굴로 3보1배의 강도 높은‘속죄 행군’을 하다가 몸이 망가지자 휠체어를 타고 유세하는 추미애 민주당 선대위원장, 그리고 3당의 여성 대변인들. 남자들은 다 어디 갔을까 - 여자들만 전면에 나섰다.
각 당의 간판급 얼굴만 여성으로 바뀐 것이 아니다. 243개 지역구에서 66명의 여성 후보들이 뛰고 있고, 56석 비례대표 후보 중 절반 이상은 여성이다. 17대 국회에서는 여성의원들이 적어도 40명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설득력 있게 들리고 있다.
한국에서 여성의원의 비율이 15대 국회까지 평균 3% 정도, 현 16대 국회에서는 5.9%(16명)에 불과한 현실을 생각하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언론 보도로만 보면 ‘여성 바람’으로 한국의 정치판이 다 바뀔 것만 같다.
그런데 한국의 친지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어떤 바람이건‘바람’ 운운하기에는 선거철 거리 분위기가 너무 착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돈 선거는 물론 정당 연설회, 합동 연설회등을 모두 금지한 개정 선거법 때문에 옛날 같은 왁자지껄한 선거판은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정치인에 대한 염증이다.
가정주부인 한 친구의 관찰로는 유권자들의 가장 보편적 정서는 냉랭한 무관심이다.
“사람들이 (선거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이 당이나 저 당이나, 이 후보나 저 후보나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지”
여성으로서 ‘여성 약진’에 대한 반응도 시큰둥하다.
“‘여자가 무슨 …’하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환호하는 분위기도 아니야. 다급해서 대안으로 내세운 거라는 걸 다 아니까”
바람은 기압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기압이 어디나 똑 같으면 바람은 불지 않는다. 고요하다. 그런데 장소에 따라 기압이 달라지면서 공기는 기압이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움직인다. 그것이 바람이다.
선거철은 ‘바람의 계절’이다. 국민들의 바램과 정치 현실 사이에는 기압 차가 생기게 마련이고 그래서 유권자들의 바램이 자연스럽게 ‘바람’을 형성하도록 마련된 제도가 선거이다. 4년만에 한번씩 부는 ‘민심의 바람’으로 정치권은 새롭게 틀을 짠다.
그렇다면 여성들을 전면에 등장시킨 ‘바람’은 어떤 바람일까. 유권자들로부터 나온 자연 발생적 바람이라기 보다는 국면 전환용 바람이라는 인상이 더 강하다. 천연 바람이 아니라 선풍기 바람이다. 몸통은 그대로인데 얼굴만 바꾼, 혹은 화장만 바꾼 형국이다.
그래서 ‘여성 바람’에 대한 한국 여성계의 반응은 엇갈려 있다. “자력에 의한 진출이 아니라 위기 모면용으로 이용당한다면 여성은 들러리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견과 “구색 맞추기이든 분위기 쇄신용‘카드’이든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에밀리의 명단’이라는 단체가 있다. 1985년 25명의 여성들이 시작해 15년 동안 7만3,000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수백만달러의 기금을 조성, 여성 상원의원 11명, 하원의원 55명, 주지사 7명을 탄생시킨 미국 최대의 여성 정치인 지원 단체이다.
EMILY란 ‘Early Money Is Like Yeast’의 약자. 이스트가 빵을 부풀리듯 일찍 선거자금을 지원해야 효과가 있다는 의미이다. 많은 여성들이 능력은 되는데도 자금력 부족으로 정계 진출을 못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조직되었다.
‘여성 바람’이 진정한 바람으로 키워지려면 한국에서도 이제는 구체적인 지원단체가 필요하다. 남성이라는 한 날개로만 날아온 한국정치에 여성 날개가 돋는 조짐은 희망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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