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거만큼 흥미진진한 드라마도 드물다.
TV 연속극 ‘대장금’이 제법 인기몰이를 했다지만 올해의 명실상부한 ‘국민 드라마’는 15일 막을 내린 17대 총선이었다. 극적인 재미로 따진다 해도 대장금보다 17대 총선이 아무래도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결의를 첫 에피소드 삼아 시작된 총선 드라마는 형식과 내용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 또 양적으로 한국의 정치판에 일대 변화를 몰고온 탁월한 ‘작품’이었다.
17대 총선이 가져온 가장 가시적인 변화는 열린우리당의 대승에 따른 정치판의 지각변동이다. 16대 국회 막바지에 민주당에서 분가, 달랑 47석으로 옹색한 살림을 꾸려온 ‘꼬마 여당’ 열린우리당은 이번 선거에서 152석을 차지, 의석 수를 단번에 3배 이상 늘리면서 지난 13대 총선이후 16년간 지속되어온 ‘여소야대’의 고정틀을 박살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의미심장한 변화는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다. 근로자들과 서민들의 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은 선명한 정책노선을 앞세워 10석을 꿰차며 원내 3당으로 자리매김하는 ‘혁명적 성과’를 일궈냈다. 이는 진보정당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굴절된 시각이 교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선거는 미국의 선거에 비해 훨씬 재미있다고 한다. 그만큼 자극성이 강하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정치판의 불안정한 역동성과 관련이 있다.
한국은 현재 정치적 변혁기를 겪고 있다. 헌정사를 양분한 군부독재와 ‘3김 체제’가 사실상 정리되고 이념의 틀을 기형적으로 뒤틀어 놓았던 남북관계가 급속한 질적 변화를 일으킴에 따라 새로운 정치적 패러다임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 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17대 총선은 구질서를 해체시켜 새로운 패러다임 속으로 흘려보내는 수문의 역할을 했다. 이처럼 엄청난 변화를 수반하는 선거, 다시 말해 거액의 판돈이 걸린 싸움판이 일반의 관심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치체제가 안정된 미국의 경우 선거가 밋밋하다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기 때문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측면이 강하다.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와 민주당의 앨 고어 부통령이 맞붙었던 2000년도 대선은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극적인 싸움이었다. 당시 고어 부통령은 유권자 득표수에서 부시를 눌렀지만 연방대법원의 개입으로 재검표 사태를 빚은 플로리다주를 놓치는 바람에 부시에게 백악관을 양보해야 했다.
2000년 선거 이후 민주당 지지자들은 백악관을 도둑맞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억울한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4년을 기다려온 이들은 ‘당선 가능성’을 2004년도 민주당 대선후보 선정 기준으로 적용, 월남전 참전용사이자 반전운동의 기수로 30년의 정치경륜을 갖춘 존 케리 연방상원의원을 부시의 대항마로 낙점했다.
그러나 정치적 양극화가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실시되는 이번 선거의 캐스팅보트는 골수 공화당원이나 핵심 민주당원들이 아닌 10%미만의 부동층이 쥐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한인들은 이민집단이면서도 이례적으로 공화당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 정설이나 정당에 대한 연대감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대개 인물중심으로 표를 던지는 부동층에 속한다고 보아 무방하다. 좀 과장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한인들의 표가 차기 대통령을 가리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17대 총선은 그 중차대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관전’으로 만족해야 하는 ‘강 건너 불구경’ 같은 선거였다. 하지만 미국의 대통령을 뽑는 11월 선거는 사정이 다르다.
점심내기용이 아닌 권익신장용 선거다. 한인 유권자들의 참여도에 따라 커뮤니티의 정치적 입지가 달라진다.
이제 미국 정치에도 관심을 기울여 보자. 주인 의식은 참여를 통해 성장한다.
이강규<부국장 대우·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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