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의 아빠일까?”
자녀가 있는 남성이라면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질문이다.
지난해 아버지날(父親節)을 맞아 홍콩의 한 정당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아빠의 모습’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소, 호랑이, 돼지, 양, 팬다 등 동물들 중에서 “어떤 동물이 아빠를 가장 닮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가장 많은 대답은 ‘소’였다고 한다.
아빠란 식구들을 위해 소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35.8%에 달했다. 권위적이고 엄한, 그래서 무서운 전통적 아버지 상인 ‘호랑이’를 고른 청소년은 26.5%. 그 외 돼지(11.6%), 양(10.5%), 팬다(8.4%) 순으로 아빠와 닮았다는 대답이 나왔다.
미국에 사는 우리 아이들은 아빠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 일하는 소, 무서운 호랑이, 순한 양, 푸근하고 익살스런 팬다, 혹은 뚱뚱한 돼지…
자영업자가 많고 노동량이 많은 이민사회인만큼 이곳에서도 가장 많은 대답은 ‘소 아빠’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런데 가족들 부양하느라 쉬지 않고 일만 하는 ‘소’들 중에 가족들에게서 소외된 ‘외로운 소’들이 많이 있다. 일에 매여 가족들과 시간을 갖지 못하다보니 아내나 자녀들과 점점 서먹해지는 외로운 가장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다.
2주전 LA 교외지역에서 자영업을 하는 50대 남성 독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미국에 온지 20년 정도, 자영업 시작한지 10여년,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소같이 일만 한 대가로 자신이 얻은 것은 철저한 소외감과 그로 인한 분노라고 그는 털어놓았다.
“아내나 자식들에게 나는 일하고 돈 버는 기계일 뿐입니다.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때로 집에 있다 보면 여기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는 경제권을 아내에게 맡긴 것이 실책이었다고 말했다. 돈 문제는 여성이 더 꼼꼼하게 잘 챙길 것 같아서 자신은 비즈니스에만 전념하고, 돈 관리는 아내에게 맡겼는데 그 결과가 지금의 자신의 처지라고 그는 허탈해 했다.
“언제부터인가 가정의 주도권이 아내에게로 넘어가더군요. 아이들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가 아니라 아내에게 부탁을 해요. 경제적 권한이 엄마에게 있다는 걸 아는 것이지요”
그 부부의 관계가 소원해진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은 있다. 밤낮으로 일하느라 얼굴도 볼 수 없는 남편/아빠,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잠자기 바쁜 남편/아빠, 아내나 자녀의 필요나 감정상태를 헤아리기에는 너무 여유가 없는 남편/아빠, 반면 전통적 권위의식 때문에 툭하면 화내고 소리지르는 남편/아빠, 그래서 하고 싶은 말, 같이 하고 싶던 일들을 하나, 둘 가슴속에 접으며 남편/아빠 없이 살아온 1년, 2년…10년의 세월, 마침내 한 지붕 아래 살지만 전혀 남남인 가족 - 이민 1세 한인사회에서 적지 않은 가정의 모습이다.
“세상에서 제일 생색나지 않는 아버지의 위치 - 가족 모두에게 해 줄 것 다 해주면서 그 모두로부터 미움받는 존재”- 스웨덴의 작가 어거스트 스트린버그가 한 말이다.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경원의 대상이 되는, 손해보는 장사를 하는 아버지들이다.
‘외로운 아버지’는 ‘외로운 남편’에서 시작된다. 아내와 사이가 좋은 데도 아이들로부터 소외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반면 ‘외로운 아내’는 있지만 ‘외로운 어머니’는 별로 없다.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수록 여성들은 애정을 자녀들에게 쏟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내와 자녀 사이는 더 밀착되고 남편은 그만큼 더 외톨이가 되고 만다.
일이나 돈이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주던 시대는 지났다. 같이 하는 시간으로만 아버지들은 사랑을 얻을 수가 있다. 우리 집의 가장은 혹시 ‘외로운 소’가 아닌지 아버지날을 맞아 모두 한번 살펴보았으면 한다. 아버지들도 위로가 필요하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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