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쓰기를 참 좋아한 시절이 있었다. 물론 편지 받기를 더 좋아 했지만 좋은 편지를 받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좋은 편지란, 읽고, 또 읽고, 길을 걸어가면서 생각하고, 잠들기 전에 생각하고, 드디어 대충 외어버리게 되는 그런 편지를 말한다. 마치 한편의 잘 서술된 수필을 음미하듯이 나는 내가 받은 편지들을 되새김질 하면서 읽곤 했다.
그런 편지는 대개 사무적인 내용은 적고 그저 나와 얘기를 나누고 싶으니까, 쓰는 동안 나를 생각하면서 필자가 쓴 것이니까 내 가슴에 와 닿는 그런 편지였다. 회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감동을 주는 편지. 그런 편지를 쓰고 싶어서 나는 밤늦게까지 책상에 엎드려 있곤 했다. 몇 사람의 친구들, 나의 정신적 성장에 도움을 준 여학교 스승님들, 대학의 은사님들, 문우들, 함께 차를 마시고 대학가를 걸었던 소수의 남자 친구들. 이런 이들로부터 편지를 받았고, 나도 열심히 편지를 썼다.
그러나 내가 정말 정성을 들여 쓴 편지들은 수신인의 주소가 없는 편지들이었다. 보낼 곳 없는 편지들을 써 놓고는 한참 후에 찢어 버리기도 했다. 그중에는 하느님께 쓴 편지도 더러 있었고 성모님 마리아께 쓴 편지도 많았다. 꽃샘바람에 섞여서 내리는 봄 밤 빗소리를 들어가며 긴 편지를 썼다. 그런 밤에는 창경원 산책길에 떨어지고 있을 벚꽃 잎들을 생각 했다. 가을이면 가을 같은 편지도 썼다.
내가 받은 편지 중에서 맞춤법이나 문장이 잘못된 편지를 나는 아주 싫어했다.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간 지금 내 자신이 한글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엉망이기 때문이다. 한글을 쓸 일이 도무지 없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 나의 구차한 변명이다. 그런데도 가끔씩 옛날처럼 깨끗한 종이에 알맞은 굵기의 볼펜으로 누군가에게, 아니면, 수신인이 없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제 편지 쓰기는 키보드와 이메일에 의해서 도태당한 공룡의 잔해에 지나지 않다. 배달부가 가져다주는 메일뭉치 속에서 편지라고 불릴 것은 한 점도 없다. 정크메일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청구서들뿐이다. 어쩌다 편지처럼 보이는 봉투가 눈에 뜨이면 너무 반가워서 재빨리 열어보지만 예외 없이 실망하게 마련이다. 나도 편지를 쓰지 않으면서 편지를 기다리는 일은 염치없는 일이다.
옛날의 편지는 우편배달부가 거두어 가면,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혹은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가로지르고, 대양을 건너 뛰어,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의 손으로 다시 배달부에 의해 전해졌었다. 오늘의 풍경은 어떤가. 하루 종일 열어놓는 이메일 함에 계속 들어오는 메일 속에서 친구나 가족한테서 오는 메일을 읽어도 크게 흥분이 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따뜻한 숨결의 결여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 스피드로 전달되는 편지는 어쩐지 냉정하다. 감정의 전달은 상실되어 버리고 오로지 메시지만 살아 있는 느낌이다. 프린트를 해놓고 다시 읽어봐도 손으로 직접 써 보낸 편지와는 아주 다르다. 우리는 지금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정보세계의 최 일선에서 일을 하면서도 나의 정서는 아직도 편지 쓰던 그 때로 뒷걸음 칠 때가 많다. 이메일과 셀폰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통신을 해결 해주는 세상. 너무도 간결하고, 편리하고, 차가운 시대. 온라인 뱅킹, 온라인 샤핑, 온라인 맞선보기, 온라인 모든 것, 온라인 뭐든지.
우리 도서관에는 역사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의 서한집이 그들의 전기와 함께 목록 되어 있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보다는, 그가 젊은 시절 애인이었으며 후에 그의 아내가 된, 밀레바 마리크에게 보낸 그 많은 사랑의 편지를 더 열심히 읽는다. 토마스 만, 마크 트웨인, 로버트 브라우닝, 프로이드 같은 사람들이 남긴 편지들을 읽어보면서, 나는 감사해한다. 그들이 만일 인터넷 이메일로 편지를 썼더라면 이렇게 많이 보존되었을까? 이렇게 감동적일 수 있을까?
송정원 베벌리힐스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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