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한 남자가 불쑥 마켓 안으로 들어선다. 나이는 40대 중반. 몸은 알맞게 살쪄있다. 머리위에다가 선글라스를 얹은 폼이 멋을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올라’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꾸벅 허리를 굽히며 ‘안녕하십니까’ 한다.
“한국 분이세요?” “네. 그렇습니다” “여긴 무슨 일로?”
얼마 전 한국사람 부부가 왔다가더니 또 한국 분?, 웬일이여?
“마켓을 파실 생각 없으십니까?” “네?” “마켓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꼭 사고 싶습니다.” “부동산에서 오셨나요?” “아닙니다. 저도 LA 위쪽 2시간 거리에서 마켓을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팔았습니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가 마켓을 보는 순간 마음이 끌렸습니다. 보름을 지켜 보았습니다”
내가 마켓을 하면서 마켓에 반했다는 사람을 보는 것도 처음이고 그 마켓을 사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처음이지만 솔직히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불경기에 이걸 팔수만 있다면 팔아버리고 다른 것을 해? 말아? 하고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대낮에 불쑥 찾아와 마켓이 맘에 든다고 하니 누군들 싫겠는가.
“제가 먼저 원하는 것이니 값은 후하게 드리겠습니다. 원하시면 지금 당장 1만 달러짜리 체크를 써드리겠습니다.”
얼떨결에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가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얼마나 마켓분야에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박사인지, 그리고 우리 마켓 근처에 있는 커다란 대형 마켓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친척이 바로 그 마켓 사장의 사돈의 팔촌과 인연을 맺었다는 이야기에 나는 홀까닥 빠져들고 말았다.
“제가 좋아서 먼저 제의를 했지만 그래도 매상장부를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지요” 내가 장부를 찾고 있는 동안 어느 틈에 그 남자는 방탄유리벽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언제 들어왔지?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것 참-
나는 레지나를 불러 꼼짝 말고 안에 있으라고 하고는 정육부 안쪽에 있는 서류함을 뒤적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그 남자는 레지나에게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해댔고 레지나도 그 남자의 화술에 그만 홀딱 빠지고 말았다.
그 남자는 매상장부를 뒤적거리며 보더니 손에 든 공책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그리고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레지나와 내가 이야기를 나눈 뒤에 마켓 가격을 이야기하자 그 남자는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예상보다 세다고 하면서 조금 낮출 수 없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흥정 끝에 합의를 보았다.
“체크를 가져 오겠습니다”
남자는 밖에 서있는 차에서 한참을 뒤지더니 마켓 안으로 들어오면서 셀폰을 걸었다.
“체크를 놓고 왔어. 책상 위를 찾아봐. 있지? 빨리 갖고 와. 좋은 분들을 만나서 아주 쉽게 마켓을 구했어. 와서 보면 당신도 반할꺼야”
남자는 다시 불쑥 유리문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생각지도 않게 좋은 가격으로 마켓을 팔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그 남자의 아내가 올 때까지 주스랑 소다랑 과일이랑 빵이랑 모든 것을 정성스럽게 대접했다. 남자는 앉아서 우리가 갖다 주는 음식을 맛있게 냠냠 먹으면서 아내에게 수시로 셀폰을 꺼내 통화를 했다.
레지나는 야채를 만지고 있고 내가 정육부에서 내려오는데 남자가 유리문을 나섰다. 아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데 잠깐 나갔다 와야겠다고 하고는 서둘러서 차에 올라탔다. 레지나와 나는 밖으로 나와 도열하고는 어서 다녀오시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남자가 가고 난 한참 뒤 레지나가 파란 얼굴로 나를 불렀다. 은행 돈 지갑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지퍼가 열려 있었고 그 안에든 돈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수표만 달랑 남아 있었다.
겨우 20달러짜리 서너장. 그 남자의 몇 시간에 걸친 기막힌 원맨쇼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돈. 잃은 돈 보다도 그 남자의 세치 혀 놀리는 재능이 기가 막히게 아까운데, 내일은 또 어디에서 마당을 펼치려나.
이윤홍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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