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때 도장을 같이 다니기 시작한 아이가 지금 스무 살이니 태권도를 시작한지도 어언 15년이 넘었다. 그동안 주위 사람들이 대회 참석을 많이 권했지만(잘 해서가 아니라 다들 나가니까) 우린 매년 우리 도장이 주최한 대회에만 의무적으로 참석해 왔다.
내 몸과 마음에 좋고 또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며, 무술이라기보다는 몸과 마음의 수양으로 수련했기 때문에 남과 경쟁하는 것은 되도록 피해 왔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지난 주말 시카고에서 열린 ‘US오픈 한마당’에 참석하게 되었다. 수년 동안 대외 활동을 종용해 온 관장님께 빚 갚는 심정으로 나섰던 게 아닌가 싶다. 마침 방학을 맞아 집에 온 아들은 연습부족으로 선수자격이 아닌 엄마의 기사 겸 보디가드(?)로 함께 나섰다.
태권도는 존경, 관용, 인내를 추구하는 정신무술이기도 하지만, 단순 스포츠로서도 현재 전 세계에서 크게 각광 받고 있다. 그래서 스포츠 대회인 세계 올림픽 경기에 포함되었으며 대련 종목만 경기를 한다. 미국 내에도 태권도 대회가 수 없이 많다. 이 대회들은 대련만이 아닌 품세, 호신술, 격파 종목 등도 포함하지만 역시 경쟁위주의 스포츠 대회들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태권도를 무술이라기보다는 스포츠로서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보며 안타깝게 여긴 200여명의 전 세계 태권도 관장, 사범, 선수, 임원들이 그래서 만났다. 그들은 스포츠로서의 태권도는 이미 올림픽을 통해 발전되고 있으니, 정신무술로서의 태권도를 지도하고 발전시키자는 의도를 모아 미주 태권도 커미티(USTC)를 설립했다. 2년 전 일이다.
세계태권도 본부인 국기원은 이미 이 같은 맥락으로 태권도를 전파하고 있다. 그래서 국기원 대회 ‘한마당’은 대련 종목이 없고, 품세도 정통식은 물론 창작으로 보여줄 수 있게 한다. 개인은 물론 가족 등 단체 출전부문도 있어서 모두 함께 모여 같이 노력하고 즐기고 배우는 대회인 것이다. 올림픽과 비교하면 대회라기보다는 일종의 축제이다.
미주 태권도 커미티는 당연히 본회 태권도 대회에 국기원의 ‘한마당’을 들여왔다. 그것이 바로 지난 주말에 열린 ‘US오픈 한마당’이다. 경쟁보다는 그동안 닦은 실력을 온 정신을 다하여 최상으로 끌어내 보이는 또 다른 수련법의 대회인 것이다. 미국 태권도와 국기원이 공동주최하여 미국에서 연 첫 국제대회로 미국 태권도 역사에 큰 전환점을 찍은 대회다.
대회 정면엔 이상철 회장을 위시한 20여명에 달하는 한국인, 외국인 태권도 관장들 외에 손성환 시카고 총영사와 대회가 열리는 샴버그시 시장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환영사 후 미국대표, 국기원 각각의 시범단은 수백 명의 경기자, 관람자들의 입을 오래 다물지 못하게 했다.
특히, 국기원의 시범은 마술에 가까웠다. 10여명이 한 순간 실수 없이 똑같은 움직임으로 보여준 고단자 품세, 상대 남자들을 여지없이 쓰러뜨리는 여자의 호신술, 키보다 높은 송판을 숨 돌릴 새 없이 계속 20여차례 발차기,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송판 대여섯 개를 차례로 깨는 발차기 등은 기본이었다.
3미터 높이 검도 끝의 사과를 발로 차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눈 가린 채 종소리만 듣고 검도 끝의 사과들을 발로 차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힘들다.
나름대로 열심히 수련하고 있음을 자부했던 우리 참석자들은, 몸과 마음을 다해 더욱 정진하면 그런 묘기도 불가능이 아님을 목격하면서 내심 마음의 자세를 달리했다. 더욱이 내 경우엔 그 묘기보다 더 힘든 불가능의 것을 얻었다.
집에 돌아온 다음 날이었다. 대학 입학 후 태권도 클럽, 클래스가 없다는 핑계로 게을러져 방학 때 집에 와도 도장 가는 일을 도살장 가는 양 꺼리던 아들이, 도장 가자며 부지런히 앞장서서 집을 나섰던 것이다.
김보경
대학 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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