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을 친 언니처럼 지내는 친지의 환갑잔치에 다녀왔다. 그녀의 시부모님과 시동생 식구, 친정어머님과 동생 부부, 아들과 약혼녀, 조카와 약혼자, 나만큼 가깝게 지내는 이웃 서너명과 그 가족들이 전부였다. 워낙 바빠서 자기 앞가림 못하는 남편을 항상 비서처럼 보좌 해왔었는데, 이번 파티는 남편이 준비한 파티였다.
그녀는 문학동우회 회원답게 각자 시 한 편씩을 선물로 갖고 와 읽어 달라고 모두에게 미리 주문했다. 그녀에 대한 자작시를 읽은 사람이 몇, 중세의 영문시 초서를 외워 낭독한 사람, 노래를 불러 그 가사를 바친 사람들, 그냥 말로써 그녀의 존재에 감사함을 표현한 사람들 등 우리 모두는 그녀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진솔하게 전했다.
거의가 서로 잘 알고 있기는 했지만, 우리의 시, 노래, 말을 통해서 알게 된, 그녀의 60년 삶이 각자의 수 년 혹은 수십년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린 더더욱 서로를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어제 식품점에 들렀을 때다. 누군가가 내부 어느 곳에서 하모니카로 크리스마스 노래를 끊임없이 연주했다. 그 자그마한 생음악 소리는 대규모 식품점 곳곳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장 보는 사람들이 하모니카 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기도 하고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눈여겨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고들 있었다.
시간 여유가 없었던 터라 뛰어 들어가 서둘러 물건을 사 갖고 나오려 했던 나까지도 왠지 느긋해지면서 가슴 한 구석에 크리스마스트리의 라이트가 켜지듯 마음이 환해져 왔다. 가냘프고 왠지 나를 위해서만 불어주는 것 같이 정성이 담긴, 하모니카에 불과하지만 성스럽게 조차 느껴지는 포근한 소리였다.
한 달 반 이상을 학기 마칠 준비로 바쁘다가 며칠 전부터는 성적을 내느라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모르고 살았었다. 아 참, 크리스마스가 오는구나! 나는 그 하모니카 소리를 들으면서야 느낄 수 있었다.
두주 전 우리 집에서 같은 과 교수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파티까지 열었는데도 그것을 의식치 못했던 것은, 그 파티가 내겐 일의 연장이어서 그저 바쁘게만 치렀기 때문인 것 같다.
누가 부는 가 궁금하여 소리를 따라 가보니 한 할아버지가 식품점 한 구석의 벤치에 앉아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점원에게 물어보니 며칠 전부터 매일 와서 열심히 하모니카를 분다고 했다.
대가로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앉아 불면서 손님들의 기분은 물론 자신들의 노고까지도 덜어 준다고 했다. 오가는 사람 모두 그에게 목 인사를 했고 그는 연주를 계속 하면서 그들에게 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한테도.
나는 평생 동안 새해를 맞는 일기장에 새해 첫날에 뜨는 해가 뭐 그리 대단하냐? 어제도 떴었고 내일도 뜰 것인데 라고 썼었다. 그러다가 몇년전 새해를 맞는 글의 부탁을 받았을 때, 새해에 뜨는 해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하다면 내게도 특별해야 할 것이라며 자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들과의 관계에 더욱 특별히 신경 써보겠다고 새해 맹세를 한 적이 있다.
그 후 그 맹세를 얼마나 지켰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고, 그 수 년 세월을 어디로 흘려보냈는지도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이제 며칠 있으면 2010년을 맞는다는 사실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번의 새해 맹세도 사람관계에 ‘더욱’ 신경 쓰는 것으로 하련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순간이건 장기간이건, 상대가 모르는 사이에 상대의 삶을 밝혀 주는 일을 한다면 내 삶도 그만큼 밝아지리라. 때론 그 하모니카 할아버지처럼 모르는 사람의 삶을 짧고 가볍지만 의미 있게 밝혀 주어도 좋고, 때론 위의 환갑잔치 주인공이 내게 그랬듯 아는 이의 삶을 끊임없이 빛나는 등대처럼 밝혀 주어도 좋고.
김보경 / 대학 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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