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LA 해머 뮤지엄은 막내를 매주 대학 기숙사로 데려다주느라 지나갈 때마다 ‘가봐야지’ 하면서도 망설였던 곳이다. 웨스트우드와 윌셔의 사거리에 있는 탓에 뮤지엄 안까지도 붐빌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찰스 버치필드 회고전이 1월3일로 끝나니 당장 시간을 내야 했다. 한해의 끝자락, 마침 방학 중이라 웨스트우드는 한산하니 미술관 가기 좋은 때였다.
검은 먹구름이 땅을 삼킬 듯이 몰려오고, 비가 쏟아지고, 땅은 질척거리고, 바람은 사정없이 불어 집과 창문은 부서질 듯 흔들거리고, 어둑해진 해저물녘에 등과 허리가 굽은 노동자들이 빈손을 늘어뜨리고 귀가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그림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런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세상은 풀벌레와 나비와 나무와 갖가지 꽃들과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과 모든 멋진 것들이 함께하는 오묘하고, 드라마가 있고, 아기자기한 곳이다라고 화가는 그림으로 <희망의 시>를 적었다.
대표작 중 하나인 <사계절>은 어려운 시절을 겪을지라도 절망에 빠지지 말고 희망을 갖고 기다리다보면 곧 찬란한 기쁨을 누릴 시기도 온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결핍, 두려움, 절망 등의 감정들을 겪었기 때문에 인생의 찬란한 계절이 왔을 때 그것이 얼마나 멋지고 빛나는 기쁨인지 깨달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쟁 뿐 아니라 지금처럼 대공황을 거친 화가의 그림은 나에게 많은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그림을 감상하는 내내 신이 화가의 손길을 통하여 차려준 만찬으로 포식을 한 듯한 만족감에 휩싸였다. 큐레이터 로버트 고버의 사려 깊은 선물에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그의 수고가 없었다면 이렇게 고귀한 품성을 갖고 반듯한 삶을 사랑했던 화가 버치필드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 없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 시기에 적절한 위로 역시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은 2009년 마지막 최고로 운이 좋은 날이었다.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 그는 그와 동시대 화가인, 내가 좋아하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에 가려져서 빛을 보지 못했다. 버치필드의 그림을 보면서, 적막함과 소외, 쓸쓸함의 감정을 절실하게 표현한 호퍼의 그림도 깊은 울림이 있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세상은 그럴지라도 멋진 곳이라고 수많은 그림으로 설명하는 버치필드의 정신세계도 호퍼 못지않다는 깨달음이 왔다. 닥친 어려움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 너머 비전과 환상을 꿈꾸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진 것이 인간의 고귀한 장점이자 매력이라는 것도 깨우친다.
햇빛이 넘치는 이곳 남가주에서 지난해 마음은 회색빛이 짙다 못해 시커먼 먹구름이 잔뜩 낀 날들의 연속이었다. 예외 없이 모두가 손에 꽉 쥐고 있던 뭔가를 잃었다. 너무 급격한 변화 때문에 모든 걸 빼앗겨버린 듯한 억울함이 솔직한 감정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런 삶의 연속선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억지로라도 환한 표정으로 ‘대체 이따위가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라는 듯 행동해야 했다.
2010년의 해가 떴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으니 여태까지의 모든 시간과 일과 계획을 매듭지어 흘러가게 하고 이제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한다. 그냥 묻어버리기 아쉽지만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해야한다. 어제의 아쉽게 저문 날이 아닌 새로운 꿈과 소망을 담은 새 날의 시작이다. 부푼 대기, 드높은 하늘, 반짝이는 나뭇잎과 꿈꾸는 눈동자들을 본다.
머지않아 다가오는 봄은 잦은 비 내린 후의 강한 태양빛으로 윌셔 길 빌딩과 슬레이트 지붕과 푸른 나뭇잎들을 황금빛으로 반짝이게 할 것이다. 여름날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서풍으로 시원할 것이며 가을은 높아진 하늘과 차가운 바람으로 한껏 달궈진 대지를 식혀줄 것이며 겨울밤에는 서늘해진 이마로 깊은 사색에 잠길 것이다. 그렇게 축제의 시간들은 올 것이다.
윤선옥 /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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