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영화제냐 아니면 도떼기시장이냐. 제63회 칸영화제는 전 세계에서 찾아온 영화인들과 기자들(4,000명)과 영화장사들과 그 고객들 그리고 관광객들까지 몰려들어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지난 13일 니스공항에서 셔틀을 타고 칸에 내린 뒤 아파트에 짐을 풀고 칸의 명동거리인 크롸젯 블러버드에 발을 디딘 나는 거리를 뒤덮은 인파에 질려 “야, 이거 한 대엿새 죽어나겠구나”하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런 인파와 번잡함과 소음에 시달려 솔직히 나는 칸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아이슬란드의 화산재와 니스에서 런던까지 가는 브리티시 에어웨이즈의 기내 승무원들의 파업 결정으로 귀국 비행기가 언제 결항할지 몰라 영화제 내내 안절부절 해야 했다.
전세계 취재진만 4천여명 북적
명품점 즐비한 거리엔 선남선녀들
‘하녀’상영 날 레드카펫 밟아봐
해변 백사장선 밤새도록 파티
칸영화제의 명물은 경쟁 영화들이 상영되는 영화제 본부 건물 팔레 드 페스티벌의 대극장인 뤼미에르 앞의 계단을 덮은 레드 카펫과 명품점과 식당과 고급 호텔과 카페가 즐비하게 늘어선 크롸젯 거리 그리고 이 거리 바로 앞의 지중해에 떠 있는 대형 요트들. 이채로운 것은 고급차를 몰고 쭉쭉 뽑아 입은 선남선녀들이 누비고 다니는 크롸젯 거리에 띄엄띄엄 앉아 손을 내미는 거지들도 보인다.
레드 카펫은 많은 영화인들이 꼭 한 번 밟아보고 싶어 하는 꿈의 계단인데 나는 한국 영화 ‘하녀’가 상영되는 낮에 레드 카펫을 밟아 봤다(작은 사진). 그러나 카펫을 진짜 밟으려면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세례 속에 밤에 열리는 갤라 시사회 때로 이 땐 턱시도를 입어야 입장할 수 있다. 이때가 가장 복잡한 때로 한 마디로 악몽이다.
영화제는 보안이 지나치게 철저해 기자실과 극장엘 들어갈 때마다 몸과 가방 수색을 받아야 했다. 영화배우들을 보기 위해 하루 종일 구경꾼들이 몰려서 있는 칼튼과 마제스틱 등 모든 호텔은 영화제 배지가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데 거리의 청소부와 스냅사진을 찍는 사진사들까지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영화제에는 할리웃의 수퍼스타들이 나오는 영화들이 전무하다시피 해 분위기가 예년보다 덜 화려하다는 것이 동료 기자들의 의견.
물가는 또 왜 그리 비싼가. 도착한 날 저녁 LA에서 영화를 사러 온 미국인 친구 마이크가 날 불러내 바다가 보이는 크롸젯 거리의 옥외 카페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스카치 J&B를 더블로 시켜 마셨는데 값이 무려 24유로. 마이크와 함께 길을 걷다가 이번 영화제에서 ‘순회공연’으로 감독상을 받은 프랑스 배우이기도 한 마티외 아말릭을 목격했다. 프랑스에는 중동과 아프리카 식당이 많은데 레바논 식당에 들러 닭고기 요리와 맥주 한 깡통을 시켜 먹었더니 값이 20유로.
내가 묵은 아파트 이름은 ‘팔레 드 플뢰르’(꽃의 궁전). 이름은 좋은데 승강기는 두 명이 정원이요 침대는 소파와 겸용. 날씨는 비가 왔다 구름이 꼈다 해가 났다 하며 변덕을 부렸다. 프랑스 사람들 일부러 영어를 안 하는 것인지 아니면 몰라서 안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영화가 시작되기 전 소개하는 사람이 불어로만 말하는 것은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도착한 다음 날 내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동료기자로 니스가 고향인 에르베의 초청으로 한 스시 집에 들렀는데 메뉴를 보니 ‘제육불고기’와 ‘불고기’라고 한글로 적혀 있다. 주인은 3년 전에 칸으로 이주한 한국인 부부.
해변 백사장에 쳐놓은 백색 텐트 안에서는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쿵작쿵작’하며 파티가 열리고 있었는데 ‘하녀’의 갤라 상영이 있은 뒤 열린 한국영화의 밤 파티도 여기서 열렸다. 영화에 나온 이정재를 만나 수인사와 함께 몇 마디 나눴다.
그는 칸을 즐기고 있다면서 “본부 건물 앞에 걸린 경쟁작 출품 국가들의 국기 중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니 마치 올림픽에 나온 것처럼 가슴이 흐뭇하다”고 말했다. 준수한 젊은이였다. 그와 공연한 전도연과 윤여정 그리고 임상수 감독도 파티에 참석했다.
매일 같이 숙소가 있는 뤼 드 파스퇴르에서부터 본부까지 걸어 다녔는데 시간은 20분 정도. 이 구간을 벗어나면 영화제와는 별 세상으로 조용(?)하다. 밤에 숙소로 돌아가다 보니 해변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에 영사되는 영화를 백사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관객들이 보고 있다.
칸의 첫 날 밤에는 나를 영화 미치광이로 만들어버린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밤 파도소리를 사운드 트랙으로 삼고 상영되고 있었다. 하와이 주둔 G.I.들인 몬티 클리프트와 버트 랭카스터의 대화 장면을 거리에 서서 보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본 이 영화 때문에 할아버지가 된 내가 지금 칸에 와 있구나.
칸을 떠나기 전날 밤에는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출품된 라이너 가슬링과 미셸 윌리엄스(고 히스 레저의 전 연인) 주연의 ‘블루 발렌타인’의 배급사인 와인스틴사가 마련한 팔레 스테파니 호텔 옥상의 파티에 들렀다. 떠나는 것이 아쉽지가 않았다.
칸영화제 대형 공식포스터가 그려져 있는 본부 건물.
출품작들 예년 비해‘기대 이하’
김기영 감독의 ‘하녀’
말끔한 멜로물 인상적
이정재·윤여정 연기좋아
가고오고 하는 날 빼고 칸에 닷새 머무는 동안 총 13편의 영화를 봤는데 영화제 측이 영화들을 잘 못 고른 것인지 아니면 내가 잘 못 고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화들이 대부분 기대 수준 이하였다. 전반적인 기자들의 의견도 올 영화들의 수준이 예년에 비해 못하다는 것이었다.
김기영 감독의 1960년 작 동명영화를 새로 만든 ‘하녀’는 말끔하게 만든 순수 오락용 멜로물로 ‘하녀의 복수’라는 부제를 붙일 만하다.
이정재와 조연인 윤여정의 연기는 좋았는데 칸영화제서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도연의 연기는 그저 그런 정도. 이와 함께 경쟁부문에 출품돼 이창동 감독이 각본상을 받은 ‘시’는 기자가 칸을 떠나는 날 상영돼 못 봤다.
줄리엣 비노쉬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란 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공증된 카피’(Certified Copy)는 ‘부부연습’이라는 부제가 어울리는 것으로 수수께끼 같은 매력적인 영화라고 볼 사람도 있겠지만 기자가 보기엔 언어의 유희로 관객을 우롱하다시피 현학적이다. 그러나 비노쉬의 연기는 상감이다. 이 영화는 상영 후 박수와 함께 일부 관객의 “부”라는 야유를 받았다.
인상에 남은 것이 독일 영화 ‘아래의 도시’(The City Below). 성경의 다윗과 바스세바의 얘기를 연상케 하는 스릴러 터치의 러브 스토리.
한국계인 일본의 만능 연예인 타케시 키타노가 감독하고 주연한 야쿠자 스릴러 ‘비도’(Outrage)는 재미도 있고 여러 면에서 손색없이 잘 만든 영화이긴 하나 지나친 폭력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하고 잔인하고 또 유혈이 난자한 장면들이 많다.
프랑스 영화계의 새 물결인 누벨바그의 기수 중 하나인 장-뤽 고다르의 ‘사회주의 영화’(Film Socialisme) 갈수록 자기 혼자만 알아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고다르의 이미지와 타이틀로 구성된 에세이. LA타임스의 비평가인 케니 투란이 도중에 나가버렸다. 난 절반은 졸았다.
내가 중국인 감독 중에 가장 좋아하는 지아 장케의 ‘알았으면 좋겠어’(I Wish I Knew)도 마음에 안 찼다. 모택동의 공산정권을 피해 대만으로 피난한 사람들과 문화혁명의 피해자들의 역사적 증언이다.
‘하녀’의 이정재와 전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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