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친구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 이십년 넘게 알아온 친구. 자주 만나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는 이제 내겐 거의 없다.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아서이기도 하고, 또 내 나이 즈음이 되면 대부분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감당해야할 삶의 몫을 열심히 살아내는 일이, 친구를 만나는 일보다 때론 더 급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는 일은 연례행사처럼 일 년에 한두번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되어버렸다. 조금씩 서로의 틈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노력을 기울일 여력도 의지도 사라져 간다. 그래서 인생은 그 벌어진 틈만큼 조금 더 삭막해지고 외로워진다.
그럼에도 삶의 굴곡 어느 지점에서나, 굽이굽이 지나게 되는 굴레 속에서 그렇게 오래 만나는 인연들이 있음에 감사할 일이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소식이 궁금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자산임엔 분명하다. 하지만 오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마음 한 켠이 시린 구멍에 바람이 들듯 먹먹해진다. 그렇게 오래된 친구임에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없고, 각자의 삶의 무게가 버거워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반갑고 오래 떠나있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익숙하고 편안하다. 품안의 자식이란 말이 있지만, 부모의 품에 있을 때도 나는 부모 품안의 자식 같은 아이는 아니었다. 매우 냉정했고 독립적이었으며, 부모님 또한 내게 그 어떤 요구나 지시나, 꾸지람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 심리적 거리감이 싫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인생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겪고 이겨가야 할 삶의 몫을 부모나 형제가 대신 맡아줄 수 없다. 그래서 가족 앞에서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삶에 지쳐 벌어진 틈들을 메워 주는 친구와 가족. 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이 줄어버렸기 때문인지, 물리적으로 오래 떨어져 있어서인지, 그들로부터 위로받는 시간은 현저히 줄었다. 대신 그 빈 시간을 책이 메워준다. 되돌아보면 그런 묵묵한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나는 책을 펼쳤었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때, 눈에 띄게 말이 줄어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유 없이 마음이 불안해지곤 했다. 집에 있던 세계문학전집 중 ‘죄와 벌’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여름방학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한 여름날 오후. 뜨거운 햇볕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30도를 웃도는 푹푹 찌는 한여름의 방. 창문과 방문을 꽁꽁 닫아두고 켜져 있던 선풍기를 끈다. 쉬익쉬익 선풍기 날개 소리가 잦아들고, 이마에 맺혀있던 땀이 소르르 흘러내린다. 책속의 낯선 이름들을 쫓아가다보니 내 마음의 불안 또한 잦아들고 있었다.
책 읽는 것이 친구와 가족보다 더 소중한 일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로 채워지지 않는, 채울 수 없는 인생의 촘촘한 시간들. 그 시간의 틈을 채우기엔 책 읽는 것만큼 쉽고도 유익한 일은 없다. 책 한권 살 경제적 여유, 또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릴 시간적 여유, 그리고 조용히 책을 읽을 작은 공간과 나를 위해 내어줄 수 있는 몇 시간의 여유면 된다. 그러면 어느새 책은 내게 말을 걸고, 또 나는 그 소리에 대답하며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다시 여름이다. 그리고 오래된 책장에서 죄와 벌을 다시 꺼내든다. 삼십대의 죄와 벌은 열다섯 살에 읽은 죄와 벌과 다를 것이다. 이십년, 그 시간을 채운 나의 과거는 다시 도스토예프스키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대화를 건넬 것이고, 또 다른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들은 또다시 내 삶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될 것이다.
김진아/ 광고전략가 쿠알라룸푸르 Young & Rubic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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