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러시아어문학을 전공했다. 이미 십수년 전 일이다. 러시아어보다는 문학에 더 깊은 관심이 있었고 몇 년 간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며 행복했었다. 문학은 문화, 역사, 예술, 그리고 철학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 그래서 그 시절의 그 공부가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살면서 더 깊이 깨닫는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러시아에 있다. 세인트 피터스버그. 1700년대 초 세워진 도시, 그리고 러시아 문화와 예술의 도시, 러시아식 발음으로는 상뜨 뻬쩨르부르끄라고 불리는 도시. 대학시절 책으로만 접하던 이곳을 십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나는 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살던 집, 그가 집필했던 공간, 그리고 그가 쓴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가 방황하며 배회했던 네바 강변과 센나야 광장에 서 본다. 물론 그 당시의 모습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그 때 그들이 느꼈을 감정을 떠올려 본다.
에르미따쥐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발레, 백조의 호수. 차이코프스키의 작품. 러시아 최고의 극장 중 하나인 이 극장에서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들이며 발레를 감상한다.
8등신도 아닌, 9등신쯤 되어 보이는 두명의 발레리나와 두명의 발레리노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니, 그들이 사람인지 백조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비현실적인 움직임들, 화려한 의상과 조명. 왕족들이 추운 겨울에 이곳에 모여 바라봤을 그 공연을, 내가 그들이 앉았던 빨간 벨벳 의자에 앉아 바라본다.
러시아의 백야. 여름이면 해가 새벽 한두시에 지는 이 곳. 러시아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 봤던 백야를 내 눈으로, 몸으로 체험한다. 해가 지지 않는 밤이라니, 얼마나 문학적인가. 어스름한 하늘은 변화무쌍한 색감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왜 그들이 그렇게 독한 보드카를 그리 많이 마시는지 알 것 같다. 그 누구라도 이 밝고 긴긴 밤을 술 없이 지새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하얗게 밝은 밤. 낭만적이기도, 또 슬프기도 한 백야의 긴긴 밤.
오래 전 책과 강의로 배운 지식과 십수년 후 내가 직접 보고 느끼는 이곳의 경험은 매우 다르다. 오래 전에 암기했던 책 속의 내용들은 내 머릿속에 얼마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몸에 전해지는 러시아의 공기, 바람, 그리고 네바 강변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느낌, 도스토예프스키가 바라봤을 이삭 성당의 십자가, 도시 곳곳에서 마주치는 초록의 공원들, 하루 종일 조그만 부스 안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지하철 검표원 여성들, 술병을 들고 대낮부터 길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러시아 남성들, 전혀 다른 느낌의 전혀 다른 경험들이다.
책을 많이 읽고, 많은 간접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 세상의 다양한 삶을 모두 살아볼 수 없고, 한정된 에너지와 시간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너 무나 적으니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직접 경험한 것이 간접경험보다 훨씬 더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든, 삶을 좀 더 이해하게 하는 것이든, 아니면 단순히 지식을 쌓는 일이 되었든 말이다.
그런데 간혹 우리는 내 머릿속의 지식에 빠져서 진정한 경험 없이 내가 모두 안다고 단정지어 버리거나 자만에 빠져버리기도 한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 책을 읽어놓고 그런 사랑과 인생을 겪었노라고 말하는 것처럼.
앞으로 십여년 후 내가 어떤 러시아를 기억할지는 자명하다. 앎보다 경험이 앞선다. 그래서 우리는 연륜이란 말로 앞서 삶을 살아온 어른들을 존경하는 것이 아닌가.
지식과 배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몸소 겪는 경험이 더 중요함을, 그래서 그런 경험을 넓히고 쌓아가는 것이 지성과 감성을 모두 넓히는 길이라는 것을, 이 도시 뻬째르부르끄는 내게 다시한번 일깨운다.
<김진아 광고전략가 쿠알라룸푸르 Young & Rubic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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