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건물 뒤쪽으로 용수나무(뽕나무 과)가 주차장 가장자리에 나란히 줄을 지어 서있다. 십수년 전 이곳으로 올 때만 해도 아담한 크기였던 용수나무들이 이제는 건물의 3층 높이까지 올라오는 것 같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푸르른 잎들은 피로한 눈을 시원하게 씻어주고 분주한 마음도 맑아지게 한다.
내가 이사 온지 몇 해가 지나 용수나무가 훌쩍 자란 다음부터 여름이면 나무 그늘 밑은 주차하기도 좋고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기에도 시원한 명당이 되었다. 새로 이사들어 온 의사들을 위해 나무 그늘 밑에서 테이블을 펴고 간단한 야외 파티를 열기도 하였다. 이래저래 용수나무 밑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용수나무는 더 커졌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문득 사람들이 나무 그늘 밑에 모이지도 않고 자동차 주차도 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붉은 열매와 송진, 그리고 나무에 모여드는 새의 배설물들이 차에 떨어져서 나도 신경이 쓰이던 터였기에 다른 이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름에도 나무 밑 파티는 사라졌다. 이제는 나무 밑에 드문드문 서 있는 차들과 용수나무에서 떨어져 지저분하게 땅에 널린 꽃, 열매들이 겨울비에 젖어 더 쓸쓸해 보일 뿐이다. 그 나무 밑을 한 노부부가 걸어가는데 나이든 그 나무의 모습과 닮아 있다.
저 분들도 태어나서 엄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었던 봄날이 있었을 것이고, 자유와 사랑의 갈망으로 뜨거웠던 젊은 날들이 있었을 것이며 성공을 향해 뛰었던 수많은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성공의 정점에 올랐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칭찬과 부러움의 말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자식들을 다 키워 내보내고 홀가분한 자유로움이 몰려들 때면 어김없이 함께 찾아오는 외로움과 노쇠함.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차가운 겨울바람이 되어 온몸을 감싼다.
육체적인 노쇠현상 가운데 기억력의 감퇴는 필연적이다. 조금 더 심해지면 ‘치매’라고 분류되는 이 현상은 정상적인 지적능력을 유지하던 사람이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뇌기능이 저하되면서 기억력, 언어능력, 판단력, 사고력 등의 지적 기능이 감퇴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 상태를 말한다.
60대 중반에는 5-10% 정도가 치매이며 나이가 들수록 많아져 80세 이상이 되면 30-40% 에 이른다. 원인으로는 알츠하이머 병, 성인병 동맥경화로 인한 치매, 우울증, 알코올, 갑상선질환, 비타민 결핍, 감염 등이 있다. 처음에는 이름, 날짜, 장소와 같은 것들을 기억하기 힘들고, 심해지면 요리하는 것이나 신을 신는 등의 일상적 활동도 잊게 된다.
잊어버리는 것들의 순서를 관찰해보면 오래되거나 어릴 적의 것들은 기억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천적으로 배운 가장 최근 것부터 잊게 된다. 마치 양파 껍질과 같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부터 날라 가는 것 같다.
치매가 심해져 후천적으로 습득한 지적능력과 교양들이 없어지면 그 사람의 심성과 평소의 생각 그리고 살면서 받았던 충격이 여과 없이 드러나게 된다. 젊어서 전쟁에 시달렸던 분들은 공포와 관련된 이야기를, 배우자의 부정으로 고통 받았던 분들은 그런 의심을 계속하며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교육 수준이 높은 분들 중에서도 심하게 욕을 하거나 상대를 향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분들도 있다. 반면 항상 웃으면서, 무의식적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여러 진면목이 포장 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겁이 덜컥 났다. 나를 덮고 가려주던 것이 다 날아가고 없을 때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것인가?
그래서 결심을 한다. 지금부터라도 항상 웃고, 감사의 말을 생각하자. 금방 없어져 버릴 사소한 것들은 버리고 영원한 가치에 집중하자. 나쁜 말과 찡그린 표정은 아예 내 머릿속에 남지 않도록 쫒아버리자. 아름다운 생각으로 노년의 삶을 가꾸어 고목이 되어서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나무로 남을 수 있다면…
치매를 예방하고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착각부터 버려야 하겠다. “나는 언제나 젊고 건강하게 살 것이며 치매는 다른 사람, 나이든 사람에게만 일어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인생을 현명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