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 남편이 방학을 맞아 다음 날이면 한국으로 떠나는 나를 다락방으로 초대했다. 그 방은 3층 두 개의 다락방 중 옷장 처럼 쓰는 방이었다. 방에 들어가니 작은 창문 가에 옆 방 의자 두 개가 옮겨져 와 있었다. 작은 테이블엔 와인 한 병, 잔 두 개, 치즈 접시가 놓여져 있었다. 우린 잔에 와인을 채우고 높이 들어 ‘드디어!’를 외쳤다.
창밖의 앞집들은 1, 2층에서 본 것 보다 훨씬 작아 보여, 마치 높은 빌딩에서 내다보는 낯선 동네만 같았다. 가로등에 비쳐진 필 아저씨네도, 앤메리 아줌마네도 웬지 실존하는 집들이 아니고 동화책에 나오는 집들처럼 환상적으로 보여졌다. 문득, 동화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의 다락방이 생각났다. 어릴 적에 10번도 더 읽어서 아직까지도 다락방 부분이 상세히 기억났다. 그 방의 창문은 옆집 다락방 창문과 마주 보고 있었지만, 고개를 길가쪽으로 쭉 빼어 내다 봤다면 앞집들이 꼭 그렇게 보였을 것 같았다.
그 다락방에서의 요술 같은 사건들을 읽으며 울고 웃었던, 수 십년 잊고 있었던 그 감정들이 몽글몽글 되살아 났다. 나는 어느 새 이웃집 인도 하인 람다스가 몰래 준비해놓은 멋진 만찬을 즐기는 세라가 되어 있었다. 남편은 남편 대로 어린 시절 다락방에 대한 추억과 감상을 기억하면서 또 다른 다락방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침 일찍 공항에 가야 했던 우린, 시간을 잊은 채 동화적 환상에 푹 빠져들었다.
중년을 넘긴 부부가, 아래층에 멀쩡하게 장식된 널찍한 리빙룸을 놔두고, 한밤중에 빽빽이 걸린 옷들과 안 쓰는 물건들로 꽉 찬, 좁고 먼지 쌓인 다락방에서 벌이는 그 광경은 누가 봐도 이해 가지 않을 광경이었지만, 우리에겐 감명적이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년을 기다렸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집은 금년에 110살이 되었다. 한국적 시간대를 빌어 실감나게 얘기하자면, 이조시대 말기에 지어진 집으로, 뒷마당에 차 대신 마차를 세워두던 시절의 집이다. 상수도시설이 없어서 목욕탕도 1930년대야 설치되었다고 한다. 대량생산도 없던 시절이라 옷가지나 가재도구들이 많지 않았어서 옷장과 벽장도 아주 작다. 그래서 우린 이사 들어오면서 기물들과 옷들을 제 방에 제대로 넣어 두지 못하고 아무도 쓰지 않는 다락방에 발 디딜 틈만 남긴 채 꽉 차게 넣었다. 그리고, 그렇게 19년을 살아 왔던 것이다.
그 후, 남편은 오래된 집 다락방의 낭만을 들먹이며 길가 쪽 다락방 창가에 사람이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고 했다. 하필이면 왜 불편하고 지저분한 다락방에서 쉬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가 그 일을 벌리면 그 곳의 잘 안 쓰는 물건과 잘 안 입는 옷들을 버릴까봐 지레 겁 먹은 나는, 그가 조를 때마다 내가 해주겠노라 고집을 피웠다.
다락방엔 온냉방시설이 들어가지 않아 여름엔 한증막이고 겨울엔 그릇에 얼음이 얼 정도로 춥다. 다른 일이 먼저 바빴던 나는 그걸 핑게로 청소를 미루고 또 미뤘다. 답답한 남편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걸 들먹였고, 우린 그때문에 각 계절마다 연중행사처럼 한 번씩 크게 다투었던 것이다.
이번 한국여행을 앞두고는 예감이 심상치 않았다. 남편이 작년 여름 내가 한국여행하는 사이 지하실을 청소하면서 안 쓰는 기물들을 다 버렸으니(나는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이번 여름여행 땐 기어코 다락방을 청소하면서 다 갖다 버릴 게 확실했다. 결국 난 한국 가기 전 날 남편이 퇴근할 때쯤에야 창가에 빈 자리 프로잭트를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기진맥진했던 그 때부터 한국가는 가방 짐을 싸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동안에도19년을 산 후에야 쉼터로 재발견한 다락방에서의 흥분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110살의 내 집에서 다음에 재발견할 건 무엇일까 생각하며 가슴이 설레였다. 이제는 그 일을 결코 미루지 말자고 결심하는데, 서울도착안내가 방송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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