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주 힘들고 긴 하루였어요. 지금이 제 자유 시간입니다.”
지난 여름 60대의 여성독자가 보내온 이메일이다. 겨우 얻은 자유 시간에 그는 내게 편지를 썼다. 머리가 터질 듯한 압박감에서 헤어나려면 압력솥에서 김을 빼내듯 누군가에게 말을 해야 했을 것이다. 가족이나 친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그는 낯모르는 나를 하소연의 대상으로 택했다.
하루 24시간 그를 옥죄는 고통의 근원은 남편이다. 70대 후반인 남편은 치매환자이다. 몇 년 전부터 남편의 성격이 너무 이상해져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그것이 초기 증세였던 것 같다고 했다. 2012년 말 치매 판정을 받은 후 상태는 부쩍 나빠졌다.
“매일 와인을 한 병씩 마시고 하루 종일 같은 질문을 쉬지 않고 하고 하루에 15번 이상 은행 어카운트를 컴퓨터로 체크하면서 하염없이 보고 있어요. 그리고는 자동납부 하는 곳 여기저기 전화해서 왜 내 구좌에서 아직 인출을 안했느냐고 묻고 또 물어요. 제가 잠시도 집을 비울 수가 없어요.”운동이라도 하면 스트레스가 풀릴 것 같지만 피트니스 센터에 더 이상 나갈 수가 없다. 남편을 혼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동네를 한바퀴 걷고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집에 돌아온다고 했다.
불교 신자인 그는 “마음을 비우고 (남편에 대해) 측은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많은 분들이 저 같은 고통을 느끼며 살고 있을 거라고 짐작 됩니다”라고 썼다.
평생 열심히 살면 안락한 노년이 보장되리라는 기대가 점점 흔들리고 있다. 노년의 안정된 삶을 위해서 우리는 보통 세 가지를 준비한다. 마음 의지할 수 있는 가족과 친구, 심신의 건강, 은퇴자금이다. 그런데 수십년 공들인 이 모두를 어이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해버리는 ‘복병’이 있다. 생의 마지막 복병, 치매이다.
새해 들어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치매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신호범 워싱턴 주 상원의원이 7일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공개했고, 한국에서는 6일 치매가 한류스타의 일가족을 동반자살로 몰고 갔다. 그룹 수퍼주니어의 리더인 이 특씨의 아버지(57)는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간다”는 유서를 남기고 80대 노부모와 함께 목숨을 끊었다.
1998년 이혼 후 혼자 노부모를 모셔온 그는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고 어머니가 중증 치매에 폐암까지 앓게 되자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치매환자를 두 사람씩 수발하며 생긴 우울증, 치료비 대느라 아파트를 담보로 빌린 수억 원의 빚 … 암담한 현실 앞에서 그는 ‘이쯤에서 끝내자’ 는 선택을 했던 것 같다.
보통 치매로 불리는 알츠하이머는 피할 수 없고 치료할 수 없는 몹쓸 병이다. 병의 원인을 모르니 예방법이 없고 일단 병에 걸리면 악화일로여서 환자가 죽어야 끝이 난다.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병이 진행되면서 환자가 전혀 낯선 어떤 존재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물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찾아볼 수도 없게 바뀐 환자를 돌보다 보면 가족은 완전 탈진상태가 된다. 많은 경우 우울증 등의 병이 생겨서 가족은 치매의 ‘숨겨진 환자’ 혹은 ‘제 2의 환자’이다. 극단적 선택이 나오는 배경이다.
지난해 5월 한국에서는 80대 할아버지가 치매 걸린 부인을 자동차에 태운 채 저수지로 뛰어들어 동반 자살했고, 8월 남가주의 하시엔다 하이츠에서는 80대 남성이 부인과 며느리를 죽이고 자살했다. 80대인 부인은 거동을 못하고 60대 초반의 며느리는 25년째 알츠하이머 환자인 데 그 자신 치매 증세가 심해지자 일가족 죽음을 택했다.
장수의 축복은 공짜가 아니다. 치매를 대가로 요구한다. 오래 살수록 치매 위험은 높아진다. 65세 이상이면 8명 중 한명 꼴로 치매에 걸리고 이후 5살 많아질 때마다 발병률은 배로 뛴다. 85세 이상이면 두 명 중 한명이 치매환자이다.
현재 미국의 치매환자는 510만명 정도. 베이비붐 세대가 60대 후반을 향하면서 환자는 급속도로 불어날 것이다. 치매는 특히 여성을 볼모로 잡는다. 치매환자의 2/3가 여성이고, 환자를 돌보는 가족 중 60%가 여성이다. 환자이거나 환자를 돌보느라 치매의 마수에 사로잡힌 여성이 1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알츠하이머 협회는 보고 있다.
한인사회에도 앞의 주부처럼 쉬쉬 하면서 혼자 고통을 삼키는 사람들이 상당할 것이다. 치매환자 가족들을 위한 서포트 그룹이 필요하다. 같은 고통을 가진 사람들은 눈빛만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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