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둥근 달이 두둥실 떠오른 14일 한인가정들의 저녁 풍경은 다양했을 것이다. 대보름이 밸런타인스 데이와 겹쳤으니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가장 서구적인 정서가 만났다. 젊은 세대의 저녁 풍경에서는 장미꽃과 초컬릿, 와인 냄새가 났을 것이고, 나이든 세대의 풍경에서는 구수한 오곡밥과 나물 냄새가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이민온 지 오래 된 중년의 부부들이 있다. 설이나 추석이라면 모를까 대보름은 잊은 지 오래고, 그러면서도 사고방식은 여전히 한국적이어서 밸런타인스 데이가 영 거북한 세대이다. 쑥스러움 무릅쓰고 남편이 장미 한 다발 내민 가정, 올해도 빈손으로 들어온 남편이 야속해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가정이 있었을 것이고, 부부 모두 아무 생각 없이 평소처럼 저녁을 맞은 가정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새 날이 밝아 전날의 다양했던 저녁 풍경은 잊혀지고 일상적 삶이 이어진다. 며칠 내로 장미 꽃다발의 향기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만국공통어 ‘장미’ 즉 사랑의 표현이 있고 없음이 남긴 감정적 흔적은 아주 오래 가는 것 같다.
대학교수인 후배가 지난 해 논문준비를 위해 한국에서 두 달을 묶었다. 오랜만에 친정에서 부모님과 지냈다고 해서 친구들이 부러워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80대인 노부모의 사이가 너무 안 좋아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두 분이 툭하면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엄마는 ‘이혼하고 싶다. 혼자 살아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세요. 자식으로서 어느 쪽도 편을 들 수가 없으니 여간 입장이 난처한 게 아니더군요.”
그런데 그게 한두 가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에서 그가 만난 40,50대 친구 후배들에게 가장 흔한 고민이 ‘노부모의 불화’ 문제였다. 한국에서 황혼이혼이 많은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오순도순 여생을 보내야 할 노부부가 왜 이렇게 서로를 할퀴며 상처를 주는 걸까. 애정 표현을 모르고 살아온 세월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후배의 부모님은 전형적인 그 세대 부부이다. 아버지는 사람 좋고 성실하지만 너무 무뚝뚝해서 아내에 대한 감정적 배려가 없었다. 시동생들 뒷바라지 하고 60대 중반까지 시부모 모시고 산 어머니는 무심한 남편 때문에 받은 상처가 깊었다.
“엄마는 가슴에 맺힌 응어리들을 지금 다 터트리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잘 받아주시면 좋을 텐데 평생 안 해봤으니 어떻게 할 줄을 모르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보통 마음속에 사랑이 있으면 표현을 안 해도 상대방이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막 사랑에 빠져서 마음도 눈길도 그 대상에 꽂혀 벗어나지를 못하는 열정적 시기에는 맞다.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누르는 것이 더 고통스런 시기이다.
하지만 결혼해서 몇 년 지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부부는 더 이상 연인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비즈니스를 이끄는 파트너이다. 감미로웠던 대화 내용은 아이의 학교 과제나 이번 달 전화요금으로 대체된다. 그나마 하루 대화시간이 얼마 안 된다.
지난 연말 한국의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부부 세 쌍 중 한 쌍은 하루 평균 30분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게다가 대화시간은 결혼기간과 반비례해서 나이 들수록 부부 사이는 조용하다. ‘사랑한다’ ‘예쁘다’ ‘멋있다’ 같이 애정을 표현하는 말은 부부 중 절반 정도가 ‘가끔 기분 좋을 때’ 하고, 50~60대는 대부분 ‘거의 안 한다’. 정서적으로 비슷한 미주의 한인 중년부부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생전 ‘사랑 한다’고 말하지 않는 배우자를 두고 사랑을 확신하기는 좀 어렵다.
‘표현’도 연습이고 훈련이다. 톨스토이는 ‘사랑은 오직 현재의 활동’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사랑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장미꽃 사는 것이 어색하다면 굳이 꽃을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내가 피곤할 때 장보기나 집안일을 나서서 하는 것, 남편이 힘을 잃었을 때 따뜻한 격려의 말을 하는 것, 그리고 상대방이 뭔가를 해주면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 것 … 모두가 사랑의 표현이다. 그런 관심과 배려가 차곡차곡 쌓여서 훗날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밸런타인스데이에 꼭 꽃을 사들고 간다는 한 남자후배는 “좀 번거롭지만 집안의 평화를 위한 보험”이라고 했다. 그날 하루를 위한 보험이 아니라 아마 평생 보험이 될 것이다. 장미꽃 향기는 사라져도 사랑받고 있다는 감동은 남는다. 사랑이 있다면 왜 표현하지 않는가.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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