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창세기 24장을 보면 나이 든 아브라함이 노종을 고향으로 보내 며느리 감을 구해 오게 한다. 종은 낙타 열 필을 끌고 길을 떠나 목적지에 도착하자 낙타들을 성 밖 우물곁에 꿇려놓고 이삭의 신붓감을 물색한다. 물 길러 온 처녀들 중 나그네는 물론 낙타들에게까지 물을 먹여줄 만큼 배려 깊은 처녀를 찾기 위해서였다.
창세기에는 낙타가 자주 등장한다. 기원전 2000년대 초반인 그 시대에 낙타는 잘 길들여진 가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이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시대에 낙타는 아직 야생동물이었다는 것이다. 퇴적층에 묻힌 낙타뼈 화석들을 수거해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을 해본 결과 낙타가 가축으로 이용된 것은 그보다 수백 년 후의 일로 확인되었다.
‘아브라함과 낙타’는 ‘이성계와 자동차’만큼이나 시간적으로 격절된 관계, 서로 만날 수가 없는 사이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거짓이야기를 꾸며댄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장구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오던 이야기가 글로 적히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이다. 창세기 속 이야기들이 글로 기록된 것은 기원전 7세기 즈음인데 당시는 낙타가 가축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먼 길을 갈 때는 으레 낙타를 탄다는 인식이 기록 과정에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중동지역 고대인들의 이야기이다. 기자가 따라다니면서 현장에서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다. 구전과정에서 이야기가 보태지기도 하고 섞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잘한 사실적 오류에 매이지 않고 큰 흐름을 볼 때 성서가 전하는 참 의미를 깨닫게 된다.
창세기 다음에 나오는 출애굽기에도 오류가 있었다. 출애굽의 주인공 모세는 수세기 동안 뿔 달린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웅장한 조각 ‘모세’를 보면 머리에 뿔이 두 개 돋아 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위대한 예언자에게 왜 뿔이 달렸을까. 신앙을 동원한 온갖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뿔’은 오역의 결과였을 뿐이었다.
4세기 말 교황 다마수스 1세는 교부 성 제롬에게 라틴어 성경 수정판을 만들게 했다. 당시 성경은 지금처럼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원본인 고대 히브리어 필사본을 토대로 히브리어 성경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번역되어 희랍어 성경,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많은 다른 버전의 성경들이 있었다. 성 제롬은 히브리어 본을 토대로 번역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를 대면하고 십계명이 적힌 석판을 들고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부분이 ‘뿔’이 난 것으로 오역된 것이었다. 오역은 종교개혁 때에야 바로 잡혔다. 중세 천년동안 모세는 뿔 달린 사람이었다.
시대적 착오나 오역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오류라면 성서를 문자 그대로 보는 좁은 시각은 더 큰 오류를 낳는다. 미국의 가장 뼈아픈 역사, 노예제도가 대표적이다. 기독교 신앙 위에 세워진 나라, 미국에서 백인들은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성경이 노예제를 지지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창세기 9장에서 포도주에 취해 잠들었던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한 구절이다. 고대인의 생활상이 담긴 성경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자주 언급된다. 그로부터 수천 년이 지난 시대에 교회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종’ 즉 노예제를 정당화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거나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기독교의 근본정신에는 애써 눈 감음으로써 저지른 오류이다.
이번주 미전국은 애리조나의 동성애 손님 거부법안으로 시끌시끌했다. 자영업자들이 종교적 믿음에 근거해 동성애 손님을 거부해도 된다는 법안이었는데 주지사의 비토로 논란은 일단락이 났다. 성서는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성소수자를 배척해야 한다는 입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으로 부딪치고 있다.
‘모세의 뿔’은 인간의 제한성을 보여준다. 인간은 불완전해서 언제든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 그런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여전히 힘이 있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계명, 사랑이다. ‘사랑’이 종교적 신념이 되기를 바란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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