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첫 부분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삶이 기대대로, 뜻대로 안 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기대대로, 뜻대로 안 되는 대표적인 예가 자녀양육이다. 부모가 머릿속에 그리는 자녀의 모습과 실제 자녀의 모습은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차이’는 대개 자녀가 사춘기 때 갑자기 나타나고, 부모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듯 충격을 받게 된다. 앞의 시를 패러디한다. “자녀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40대 한인 최모씨가 지난 10일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에서 15살짜리 아들의 뺨을 때리다가 체포되었다. 공공장소에서 아빠와 아들이 언쟁을 벌이던 중 분을 참지 못한 아빠가 아들의 뺨을 때리는 것을 공원 순찰대원이 보고 체포했다. 폭행과 위협 등 아동학대 혐의이다.
텍사스, 오스틴에 사는 이 가족은 모처럼 가족여행을 갔던 것 같은 데 여행을 안감만 못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한창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아들, 나이로 봐서 필시 사춘기 자녀를 키워본 경험이 없는 아빠. 거기에 한국식 아빠와 미국식 아들이라는 일반적 한인가정의 조건을 대입해보면 그림이 나온다.
엇나가는 아이와 노발대발하는 아빠가 하루가 멀다 하고 부딪쳐서 집안 조용할 날이 없는 풍경 - 집집마다 자녀들 사춘기 때면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주위의 친지들과 그랜드 캐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니 반응은 두 가지였다. “그 아빠 백번 이해된다”와 “공공장소에서 아이를 때리다니 제 정신인가? 아빠가 참아야 했다” 이다. 전자는 아빠의 심정, 후자는 아빠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 것인데 그 아빠 열 받는 심정을 이해하기는 전자나 후자나 마찬가지이다.
지인 중 한 주부도 몇 년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고등학생인 아들과 대학생 딸을 데리고 여름휴가를 갔을 때였다. 처음부터 가기 싫다는 아들을 달래서, 그런 아들과 좀 친해지기 위해서 여행을 갔는데 아들은 여행지에서도 사사건건 삐딱했다. 참다못한 그의 남편이 언성을 높이고, 여기에 아들이 질세라 맞서면서 더 이상 휴가를 즐길 분위기가 아니었다. 휴가 일정 중간에 짐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다며 “그랜드 캐년의 아빠 심정 충분히 이해된다”고 그 주부는 말했다.
사춘기 아이들 키우기는 왜 이렇게 힘들까? 첫째는 아이 자신이 힘들기 때문이다. 호르몬 변화로 심신에 변화가 오는데 그 변화들에 스스로가 익숙하지 않다. 낯선 에너지와 충동들이 불쑥 불쑥 치솟고 감정이 억제되지 않아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듯 항시 불안정하다.
그런가하면 이미 어른이 된 것 같아 무엇이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싶다 보니 매사에 부모와 부딪치면서 ‘이유 없는 반항’이 시작된다. 부모에게서 떨어져 독립된 개체로 자라나는 자연스런 성장과정, 성장통이다.
둘째는 부모가 아이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라면 좋아서 어쩔 모르던 아이가 갑자기 쌩하게 태도가 바뀌고, 고분고분 말 잘 듣던 아이가 대들기 시작하면 부모는 당황한다. “저 아이가 내 아이 맞나?” 싶게 배신감을 느끼고 상처를 받는다. 엇나가는 아이 바로 잡아보려고 야단치고 잔소리 하고, 그러다 손찌검이라도 하게 되면 아이와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진다.
사춘기 부모들 모두가 겪는 보편적인 경험이다. 여기에 이민1세 한인가정은 어려운 점이 한 가지 더 추가된다. 아버지들의 좌절감이다. 권위적 아버지만 보고자란 1세 아버지들은 미국식 좋은 아버지 역할을 어떻게 할지 감을 못 잡는다. 잘못을 지적하고 가르치면 ‘네’하고 따를 줄 알았던 아이가 말대꾸 하고 반발하는 것을 1세 아버지들은 감당하지 못한다. 게다가 언어장벽으로 소통이 잘 안 되는 것도 아버지들의 좌절감을 깊게 한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주먹이 올라가면 그랜드 캐년 아빠 같은 사태가 터지고 만다.
사춘기 자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지금은 대학생인 아들이 사춘기 때 심하게 말썽을 부렸다는 한 아빠는 “그냥 참으라. 한없이 참으라”고 충고한다. 사춘기의 터널을 통과해야 할 사람은 결국 아이 자신. 아이를 이해하며 지켜보다 보면 사춘기 악몽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것이다.
푸시킨의 시는 이어진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리라.” 그렇게 아이들은 자라고 철이 든다. 그러니 욱하는 우리 한인 아빠들 참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참는 아빠에게 복이 있나니.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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