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신라의 혜통 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출가하기 전 어느 날 그는 집근처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몽둥이를 들고 쫓아가 수달을 잡은 그는 껍질을 벗기고 뼈를 발라서 고기를 끓여먹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마당가에 버린 뼈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핏자국이 띄엄띄엄 있어 따라 가보니 근처 굴로 이어졌다. 굴 안에서 수달의 뼈는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있었다. 그 광경에 크게 놀라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마침내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죽어서도, 뼈만 남아서도, 자식 챙기는 절절한 마음을 멈출 수 없는 것이 모성애이다. 하물며 내 몸은 멀쩡한데 어린 자식이 죽었다면 그 애통함은 얼마나 크고 깊겠는가. 내가 대신 죽어서라도 자식을 살리고 싶은 것이 모성애이다.
모성애로, 부성애로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던 진도 팽목항이 한산해지고 있다. 진도 실내 체육관을 가득 메웠던 실종자 가족들과 그들의 애타는 아우성은 하루하루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있다. 대신 안산 올림픽 기념관에 마련된 합동 분향소가 붐빈다. 제발 살아서 구조되기를 온 국민이 기도했던 아이들은 시신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아직 시신으로도 아이를 찾지 못한 부모들은 분노와 절망감으로 피가 말라가고 있다.
지난달부터 참사가 줄을 이었다. 하늘에서 땅에서 바다에서 사고가 이어졌다. 3월 초 239명을 태운 말레이시아 항공 여객기가 사라지더니 지금껏 행방이 묘연하고, 3월 말에는 워싱턴 주에서 산사태가 나서 40여명이 사망했다.
지난 10일 캘리포니아에서는 학생들 수십명을 태우고 북가주의 대학 방문에 나섰던 버스가 트럭과 충돌해 학생 등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몇 달 후면 집 떠나 대학에 간다고 잔뜩 부풀었던 아이가 주검으로 돌아온 현실 앞에서 부모들은 충격을 가누지 못했다. TV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는 남의 일 같지 않은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는 닷새 후 한국에서 믿을 수 없는 참사 소식이 전해졌다.
세월호 침몰은 단순한 여객선 사고가 아니다. 상징성을 갖는다. 우선순위가 마구잡이로 뒤바뀐 사회의 단면을 뚝 잘라서 보여준 사건이다. 성장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에서 기본적 가치들은 모두 뒤로 밀렸다. 사람의 안전은 생산성과 이윤에 밀리고 원칙과 책임은 편법과 적당주의에 밀렸다. ‘빨리 빨리’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대충 대충’이 씨줄과 날줄로 엮인 사회에서 안전망은 구멍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국민 보다 윗선 눈치 보기에 급급한 관료조직이 더해지면서 총체적 부실은 완성되었다.
한국에서 사고가 났다하면 대형사고가 되는 이유이다. 끝내 구조되지 못한 300여 사망·실종자 가족들이 슬픔을 넘어 원통하고 분한 이유이다. 더 이상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고 절규하는 이유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한치 앞을 모르는 게 우리네 삶” “있을 때 잘하자” … 같은 말들을 주변에서 많이 듣는다. 선장, 승무원, 선사, 관련 부처 장관, 총리, 마침내 대통령에 대한 한바탕의 성토가 있고 나면 이어지는 주제는 ‘죽음’ ‘상실’ ‘불확실성’ 이다. 주머니 속 유리잔처럼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우리의 삶의 조건이다.
연이은 재난들이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후회 없이 살라는 것이다. 사회뿐 아니라 개인의 삶도 가치의 우선순위가 확실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
이민 1세 부모들이 하는 후회가 있다. 돈 버느라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한 데 대한 후회이다. 먹고 살기 바빠서, 빨리 자리 잡고 싶어서, 집 늘리고 페이먼트 하느라, 아이들을 좀 더 넉넉한 환경에서 키우고 싶어서 … 일에 매여 살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은 다 자라 집을 떠나버렸더라는 것이다. 돈은 있어도 부모와 자녀 관계가 서먹한 가정들이 적지 않다.
고사리 같은 손잡고 동네 공원에 가고, 겁먹은 눈망울을 보며 자전거를 가르치고, 학교 발표회에 가서 긴장한 아이의 모습에 같이 긴장하고, 티격태격 다투며 장거리 가족여행을 가고 … 때를 놓치면 절대로 다시 할 수 없는 경험들이다. 아름다운 삶의 내용들이다.
가라앉는 여객선내에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죽음을 예감하며 보낸 카톡 메시지들은 ‘사랑한다’ 였다. “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놓는다.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특히 눈길을 끌었었다. 메시지를 보냈던 신영진(16)군은 다행히 구조가 되었다.
어느 날 우리가 무심코 말한 ‘안녕’ ‘잘 다녀올게’ ‘사랑해’가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고 그 말을 들을 사람이 있는 것에 감사하자. 우리 삶에서 사람과 사랑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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