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 한살 반 된 딸의 손을 잡고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에 내렸다. 미국에 첫 발을 디딘 날이었다. 갈아탈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 안을 구경하던 중 어린 사내아이 둘을 데리고 가는 한 엄마와 마주쳤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가진 엄마들은 으레 서로 아는 체를 한다. 본능처럼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눈인사를 나누며 “아이가 참 예쁘네요!” 같은 덕담을 주고받는다. 서울에서 몸에 밴 대로 상대 엄마를 보며 미소를 지으려는데 그 여성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백인 여성과 백인 아이들이었다. 앞에 사람이 아니라 돌덩이가 있는 듯 완벽하게 무표정인 그 여성을 보며 순간 깨달았다. ‘여기는 미국!’ 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차별적 언행도 없었지만 인종차별의 느낌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지난 한주 인종차별 이슈로 전 미국이 시끌시끌한 광경을 보며 뉴욕 공항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거기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는 인종차별의 그림자이다.
평등을 보장한 법과 제도로 공적 공간에서의 인종차별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직장이나 상점 등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차별했다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끼리끼리 모인 사적인 공간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차별은 얼마나 사라졌을까. 여전히 뿌리가 깊다는 생각이다.
LA 클리퍼스 구단주인 억만장자 도널드 스털링(80)이 인종차별과 관련해 발가벗겨지는 수모를 당했다. 흑인을 모독하는 발언이 고스란히 담긴 음성파일이 가십사이트를 통해 공개되면서 어느 부분을 가리고 감추고 할 수도 없게 노출되었다.
파일은 그가 50살 연하의 여자친구와 말다툼 하는 내용을 녹음한 것이다. 손녀뻘 여자친구가 매직 존슨 등 흑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함께 찍은 사진을 소셜네트웍에 올리곤 하는 데 대해 그는 대단히 못마땅해 하며 말했다. 밖에 나가서 무슨 짓을 해도 좋지만 흑인들과 같이 경기장에 나타나지 마라, 흑인들과 어울리는 걸 제발 광고하고 다니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유태인인 그는 “이스라엘에 가면 흑인들은 개 취급 받는다. … 옳고 그름을 떠나 세상이 그렇다. 그런 문화를 바꿀 수도 없고 바꾸고 싶지도 않다”는 말도 했다.
흑인이 80%에 달하는 NBA가 발칵 뒤집히고 그에 대한 성토로 미국이 죽 끓듯 했다. 평소 스털링과 친구처럼 지냈다고 여겼던 존슨은 특히 배신감을 감추지 못했다. NBA는 그에게 영구 축출이라는 중징계를 내렸고, LA 타임스는 이를 1면 전단기사로 보도했다.
인종차별과 관련 두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인종차별은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 인종차별적이라는 사실이다.
한인들이 얼마나 인종차별적인지는 우리 스스로가 안다. 스털링이 여자 친구에게 한 발언을 한인가정에서 아빠가 딸에게 한 말로 바꿔보면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아마도 더 심한 말로 흑인과 어울리는 걸 반대하는 아빠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뉴욕 공항에서 내 앞에 있던 백인 엄마의 냉담한 표정은 아마도 요즘 한국에서 이주여성들을 대하는 태도와 닮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필리핀,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일하러 온 노동자들 그리고 한국남성과 결혼해서 온 동남아 여성들이 한국에서 당하는 차별은 미국에 사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인권 사각지대이다.
모든 차별의 시작은 ‘다름’이다. 인종이 달라서, 민족이 달라서, 문화가 달라서, 종교가 달라서, 출신지역이 달라서 차별하고 차별받는 일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난다. 미국에서도 피부색만이 차별의 구실이 된 건 아니었다.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 유럽출신 백인들 그리고 유태인들도 이민초기 대단한 차별을 당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반 기근을 견디다 못해 미국으로 온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영국과 미국의 연극에서 멍청이의 대명사로 꼽힐 만큼 손가락질을 당했다. 수적으로 많아지고 미국사회에 동화하면서 유럽의 백인들을 겨냥한 차별은 사라졌다.
인종차별은 저절로 뿌리 뽑히지 않는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 ‘그들’을 적으로 보는 의식은 집단의 생존을 위해 형성된 진화의 산물이라는 해석도 있다. 차별이 본능에 가깝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 인종차별이라는 더티 밤이 있다고 생각하자. 폭탄이 끝내 터지지 않도록 잘 간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피부색’ 대신 ‘사람’, ‘다름’ 대신 ‘같음’을 보는 시각을 의식적으로 길러야 하겠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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