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빨간 반다나(대형 손수건)를 처음 갖게 된 것은 6살 때였다. 소년은 아버지가 교회에 갈 때면 양복상의 윗주머니에 흰 손수건을 꽂고, 바지 뒷주머니에는 머리빗을 빨간 반다나에 싸서 꽂아 넣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린 눈에 빨간 반다나가 멋져 보였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반다나를 하나 주었고, 이후 빨간 반다나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목에 두르기도 하고 헬멧 아래 머리를 감싸기도 하며 몸에서 떼지를 않았다.
그의 빨간 반다나 하나가 이번에 완공된 9.11 추모박물관에 전시되었다. 15일 열린 개관식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9.11의 참 정신을 보여준 인물로 ‘빨간 반다나의 청년’을 소개했다. 미국은 어떤 외부적 공격에도 암반처럼 끄떡없을 것인데 그런 힘의 근원이 바로 9.11 정신, 사랑과 연민, 희생의 정신이라고 대통령은 강조했다.
“사람들은 그 청년의 이름도, 그가 어디서 왔는 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빨간 반다나의 청년이 있었기에 자신들이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오바마는 13년 전 붕괴 직전의 건물 안 아비규환 속에서 차분하게 사람들을 구출해낸 이름 없는 영웅을 기렸다.
그가 테러공격을 당한 세계무역센터 남쪽 빌딩 104층에서 투자전문가로 일하던 웰즈 크라우더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몇 달 뒤였다. “연기와 먼지가 자욱한 속에서 빨간 반다라를 마스크 삼아 코와 입을 가린 청년이 우리를 구해줬다”는 생존자들의 말이 신문에 보도되고, 이를 전해들은 순간 그의 어머니 앨리슨 크라우더는 그가 아들 웰즈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들은 빨간 반다라를 하루도 몸에 지니지 않은 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테러 직후 “엄마, 웰즈예요. 나 괜찮아요”라고 전화 메시지를 남겼던 그는 이듬해 3월19일에야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전화를 한 9시12분부터 건물이 내려앉은 9시59분까지 40여분동안 그는 생애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다. 16살 때부터 자원봉사 소방관으로 일했던 그는 한편으로 불을 끄고 한편으로 응급시술을 하며 부상자를 부축하고,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인솔해 수십층 아래로 대피 시키고,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가 다른 사람들을 구조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는 건물이 붕괴된 순간 소방대원들, 응급구조대원들과 함께 시멘트 더미에 묻혔다. 그의 나이 겨우 24살이었다.
대형 참사가 터질 때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절망감을 떨치기 어렵다. 얽히고설킨 탐욕의 고리들이 사고의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인간이란 이렇게도 비루하고 던적스런 존재인가 절망하게 되는 데 그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인간들을 만난다. 생존본능밖에 남아있지 않을 재앙의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느라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초월적 존재들이다. 9.11 테러로 희생된 근 3,000명 중에 웰즈 같은 영웅들이 다수 있었고, 세월호 침몰 때도 아름다운 영웅들이 있었다.
극도로 긴박한 상황에 ‘나’ 대신 ‘남’을 돌보는 영웅적 행동은 어떻게 가능할까.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의 필립 짐바도 명예교수와 위스콘신 의과대학의 제노 프랑코 교수는 영웅의 심리적 내면을 연구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영웅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들은 평소 다른 사람들의 안녕에 관심이 많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이입과 연민의 정도가 높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태를 보고 이해하기를 잘 한다. 둘째는 자신감이다. 극한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많은 경우 적정한 기술과 훈련을 갖추었다. 소방대원으로 훈련받은 것이 웰즈에게 힘이 되었을 것은 물론이다. 셋째는 확고한 도덕관념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살면서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개인적 위험도 감수할 자세가 되어있다.
연구진은 이런 성향이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있는 만큼 누구나 영웅이 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말한다. 앨리스 크라우더가 보는 ‘영웅’도 비슷하다. 9.11 추모박물관 개관식에 초청받은 그는 아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웰즈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한 가족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서로 돌아보고 보살피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의미이지요.”
“세상에 평화가 없는 것은 우리가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 테레사 수녀의 말이 떠오른다. 영웅은 존경의 대상이지만 영웅이 자꾸 필요한 사회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영웅이 없어도 되는 세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아름다운 희생들이 가슴 아프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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