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명의 계시(Manifest Destiny)
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노예제도를 둘러싼 동상이몽
아메리카 개척자의 특징은 끊임없이 주인 없는 처녀지를 향해 전진하는 강력한 의욕이었다. 아메리카에서는 ‘정복’이나 ‘제국’이란 말이 호감을 사지 못했다. 미국인은 스스로 전 대륙을 점유하고 개발하는 일이 ‘천명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영국 역사가 폴라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섬의 백성은 그 섬이 아무리 좁아도 그 안에 가둬두면서, 다른 백성에게는 한없이 광대한 대륙 전체를 정복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천명이다.”
그러나 미국인의 생각은 달랐다. 서부의 확장주의자들은 합병한 지역의 주민을 평등한 위치에서 연방에 가입시키려 했고, 더구나 그 지역에는 사람이 거의 거주하지 않았으므로 전혀 양심에 꺼리는 일이 없었다. 아메리카를 ‘곤궁한 몇몇 미개인을 위한 사냥 금지 구역’으로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남부의 확장주의자들은 의회 내에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노예주의 탄생을 바랐다. 그들은 서부가 그들에게 협조해 노예제도를 지지하기를 바랐으나 밀과 강냉이 농사에 전념하던 서부는 여전히 확장주의자이긴 했어도 노예제도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북부와 동부의 일부 시민은 내심 반확장주의자였으나 이는 도덕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상원의 세력 균형을 뒤집을지도 모를 새로운 주의 창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토지를 구하라
서부의 농민도, 남부의 목화 농장주도 토지를 원했다. 대체 토지를 어디서 어떻게 구할 것인가? 캐나다 쪽으로는 길이 없었다. 영국을 공격하는 것은 실속도 없을뿐더러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경험이 말해주었다. 반면 남부와 서부에는 광대한 스페인 제국이 있었는데 그곳은 너무 취약해서 마치 침범하길 기다리는 듯 보였다.
텍사스와 멕시코의 광대하고 비옥한 지역은 테네시, 미시시피, 루이지애나의 개척자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 지방에는 주민이 거의 없었다. 19세기 초 몇몇 미국인이 스페인의 허가도 없이 그곳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821년 모지스 오스틴이 스페인 당국에 미국인 300가족의 이주 허가를 신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망했고 그의 아들 스티븐 오스틴이 사업을 계승했다.
1830년경 텍사스에는 2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거주했고 그중 일부는 노예를 거느렸다. 그들은 멕시코 정부 치하에서 벗어나 독립주로 자립할 것을 선언하기로 했다. 애초에 그들은 멕시코와 텍사스가 서로를 위해 완전 분리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알라모를 잊지말라
1836년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왔다. 부대를 거느린 산타 안나가 샌안토니오로 진격해 텍사스인 한 분대를 참혹히 살육한 것이다. 샌안토니오에서는 주민과 사병이 알라모 예배당, 수도원 그리고 수녀원으로 구성된 전도소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약 180명의 텍사스인이 4,000명 정도의 멕시코인을 상대로 13일 동안 영웅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방어군이 대부분 전사한 뒤 진지는 함락되었고 최후까지 살아남은 다섯 명도 점령 직후 산타 안나의 명령으로 학살당했다.
이후 “알라모를 잊지 말라!”는 말은 텍사스의 구호가 되었다. 복수를 위해 한 부대를 편성한 텍사스인 샘 휴스턴 장군은 1836년 샌 재신토에서 산타 안나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포로가 된 산타 안나는 텍사스의 독립을 허용했으나 멕시코 정부는 무력 행사로 이뤄진 조인에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어쨌든 텍사스는 법률적으로 사실상 공화국이 되었고 샘 휴스턴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휴스턴은 앤드루 잭슨의 오랜 친구로 사람들이 추종할 만큼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텍사스의 국기는 별 하나를 그린 것이었는데 이것은 아메리카의 성좌에 가입하려는 그들의 소망을 표시한 것이었다. 스스로를 미국인이라 부른 그들은 미합중국에 합병되기를 원했다.
-미-멕시코 전쟁 개막
멕시코는 적어도 법적으로는 텍사스의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는 텍사스가 독립을 선언한 이후 그 지역을 재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1846년 4월 멕시코군이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오면서 기마대의 소 전투가 벌어졌고 전사자가 발생했다. 포크는 교서를 의회에 전달했다.
“이제 인내의 술잔은 비었다.(…) 멕시코는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고 미국인의 피를 미국 땅 위에 흐르게 했다.”
1846년 5월 12일 의회는 선전포고를 가결했고 멕시코공화국의 도발로 미국은 전쟁에 돌입했다. 이 전쟁의 진짜 목적은 캘리포니아 정복에 있었다.
태평양의 아메리카 함대는 1845년에 이미 멕시코에 선전포고를 하면 즉각 캘리포니아의 전 항구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846년 1월 필립 커니 장군은 500명의 멕시코인을 포함한 1,800명과 함께 캘리포니아 정복에 나섰는데, 그가 도착했을 때는 벌써 점령이 끝나 있었다. 아메리카 해군이 몬터레이에 상륙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순조롭게 멕시코로 진격해 민주당을 당황하게 했다. 1847년 9월 17일 스코트 장군이 아메리카 군대를 사열하는 가운데 미합중국은 ‘몬테주마 궁전’을 점령했다. 1848년 체결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Treaty of Guadalupe Hidalgo’에 따라 멕시코는 1,500만 달러의 배상을 받고 리오그란데 강을 경계로 뉴멕시코와 상부 캘리포니아를 할양할 것을 승인했다. 이것은 합병이 아니라 말하자면 강제 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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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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