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번째 만나는 폭포.
살다보면 좋은 경치를 만나게 되는데 이런 좋은 경치를 만났을 때 사람마다 그 생각하는 바가 다를 게다. 좋은 경치를 만나면 나는 술을 생각한다. ‘아…, 여기서 술을 한잔 하면 참 좋겠는데…’하는 생각을 한다. 봄날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에서 한 잔, 여름날 빗소리 들으며 한 잔, 가을날 불타는 단풍 속에서 한 잔, 겨울밤 거리를 헤매는 바람소리 들으며 한 잔. 술이라는 게 원래 핑계도 많고 이유도 많다. 지난여름 조그마한 폭포가 여럿 있는 계곡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햐…, 여기서 한잔하면 멋지겠는데?…’거기가 셰넌도어 국립공원 안이어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정호승 시인의 ‘가을 폭포’를 읽으면서 아쉬움을 달래본다.
술을 마셨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라
가을폭포는 낙엽이 질 때마다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
외로운 산새의 주검 곁에 누워 한 점 첫눈이 되기를 기다리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일어나 가을폭포로 가라
우리의 가슴속으로 흐르던 맑은 물소리는 어느덧 끊어지고
삿대질을 하며 서로의 인생을 욕하는 소리만 어지럽게 흘러가
마음이 가난한 물고기 한 마리
폭포의 물줄기를 박차고 튀어나와 푸른 하늘 위에 퍼덕이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서 몸을 던져라
곧은 폭포의 물줄기도 가늘게 굽었다 휘어진다
휘어져 굽은 폭포가 더 아름다운 밤
초승달도 가을폭포에 걸리었다
입장료와 주차장
내게 한 잔 생각이 나게 한 계곡은 시더 런 트레일(Cedar Run Trail)이 있는 계곡이다. 셰넌도어 국립공원 안에 있고, 지난주에 소개했던 화이트 오크 캐년 트레일(White Oak Canyon Trail) 바로 곁에 있다. 출발하는 주차장이 같다. 지난번에 소개했다시피 여기는 국립공원 구역이므로 입장료를 내야하고, 초소가 문을 닫았을 때에는 자율 납부한다.
입구 초소에서 나눠주는 무료지도에는 시더 런 트레일에는 두 개의 폭포가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나는 모두 다섯 개의 폭포를 보았다. 이 다섯 개의 폭포가 있는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 시더 런 트레일인 것이다. 옆에 있는 화이트 오크 캐년에 있는 폭포가 장엄한 남성형이라면 여기의 시더 런 트레일에서는 아담한 여성형의 폭포를 만나게 된다.
가을에는 물 색깔도 다르다.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하여간 가을이 되면 나무만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하늘도 색이 달라지고 물도 가을색을 담는다. 하늘, 산, 물이 모두 가을색으로 바뀌는 곳으로 간다. 시더 런 트레일.
남북전쟁 유적지와 이정표
트레일 입구를 들어서면 곧 작은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10분 정도만 가면 첫 번째 이정표가 있고 거기서 길이 나뉜다. 이 이정표는 주차장에서 0.2마일 되는 곳에 있는데 시더 런 트레일(Cedar Run Trail)은 왼쪽 길임을 알 수 있고 또 스카이라인 드라이브까지 3.0마일, 호크스빌 갭(Hawksbill Gap)까지 3.0마일이라는 표시도 보인다.
만일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지난번에 소개했던 화이트 오크 캐년 트레일(White Oak Canyon Trail)의 로우어 폭포(Lower Falls)로 가게 되는데 거리는 1.3마일.
첫 번째 이정표를 지나 10분 조금 더 가면 두 번째 이정표를 만난다. 첫 번째 이정표와 두 번째 이정표 사이의 오른쪽에 돌로 이루어진 인공축조물이 있다. 높이는 1미터가 채 안되고 폭도 2미터를 넘지 못하지만 길이는 약 40미터쯤 되는데 마치 돌로 쌓은 전투용 진지라는 느낌을 준다. 남북전쟁의 유적인지 아니면 대공황기에 있었던 이 지역 CCC(The Civilian Conservation Corps) 활동의 흔적인지 알 수는 없다.
두 번째 이정표에서도 길이 나뉘는데 오늘은 계속해서 왼쪽 길로 접어든다. 이 이정표에서 오른쪽으로 0.8마일을 가면 화이트 오크 캐년 트레이로 연결된다. 만일 시더 런 트레일에서 다섯 개의 폭포를 모두 본 후에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이 길로 가서 화이트 오크 캐년 트레일의 폭포를 보러가는 것도 해볼 만하다.
물놀이하기 좋은 첫번째 폭포
두 번째 이정표의 왼쪽으로 접어들면 여지껏 자장가처럼 들리던 물소리가 마치 기지개를 켠 듯 이제는 제법 크게 들리는데, 주차장을 출발한지 30분 만에 첫 번째 폭포를 만난다. 편안한 느낌을 주는 폭포이다. 폭포 앞에는 가로세로 모두 10미터를 넘지 않는 작은 연못이 있어서 여름날 어린이들 물놀이하기에 좋다. 지난여름에 여기서 물고기를 물고 가는 물뱀을 봤다. 그 물뱀을 3분 정도 따라다니며 지켜보았는데 입에 문 그 물고기가 계속 퍼덕이던 것을 보면 독이 있는 종류의 물뱀은 아닌 것 같다.
이 첫 번째 폭포 앞에서 바위를 밟고 물을 건너면 경사각이 60도 정도 되는 길이 나타난다. 여기서 부터는 등산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겠다. 깊은 계곡을 오른쪽에 두고 계속 올라가면 점차 물길과 멀어진다. 물길과 멀어지기는 하지만 물소리는 잘 들리는데, 눈 아래 펼쳐진 계곡과 계곡 건너편 산 그리고 계곡 사이로 보이는 먼 산에 때때로 눈길을 주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다. 산에 갔다 와서 산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등산로 바닥뿐이라면 그 등산은 얼마나 초라할 것인가. 잠깐 잠깐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남는 삶이 아닐까.

첫 번째 만나는 폭포. 두 번째 만나는 폭포. 세 번째 만나는 폭포. 다섯 번째 만나는 폭포.(왼쪽부터)
비탈길 따라 두 번째 폭포
첫 번째 폭포를 지나 본격 등산이 되면서 등산로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약간의 인공적 손질을 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길 주변의 돌을 가져다가 계단을 만드는 등 걷기 편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CCC의 젊은이들이었겠지만 그게 누구든 고마운 일이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므로 사실 세상을 산다는 게 감사 덩어리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자는 것도 모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한다. 인간은 의존적 존재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도움을 받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그러니 내게 도움을 주는 이에게 감사를 해야 하는 것이고, 나도 그 누군가에게 감사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두 번째 폭포는 첫 번째 폭포를 지나고 나서 10여분 더 걸으면 만나게 된다. 길 오른쪽으로 보이는 이 두 번째 폭포는 등산로에서 80도 정도의 비탈길을 따라 내려간다. 내려가는 거리야 10여 미터밖에 안 되지만 산에서는 첫 번째도 안전, 두 번째도 안전이므로 두 번째 폭포의 아랫부분으로 내려가려면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한다.
물가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 나누기 좋은 세번째 폭포
세 번째 폭포는 두 번째 폭포를 떠나 10여분 더 지나면 만난다. 폭포는 위에서 보는 것보다는 밑에서 보는 것이 더 좋은데 이 폭포의 아래쪽을 내려가려면 등산로에서 폭포 아래쪽으로 바로 내려갈 수는 없다. 이 폭포의 상단에 건너는 징검다리가 있고 그것을 건넌 후 바위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서 이 폭포를 감상하게 된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해답을 찾는데 여기가 그렇다. 폭포의 가장 낮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폭포의 가장 높은 곳을 가로질러 가야하다니….
네 번째 폭포와 세 번째 폭포 사이는 거리가 좀 있다. 시간으로 대략 30분 정도. 하지만 네 번째 폭포는 여기의 5단 폭포 중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에 이 30분이 아깝지 않다. 그리고 세 번째 폭포를 출발할 때부터는 오른쪽 밑에 펼쳐진 계곡을 자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구역이 가장 길고 또 나중에 내려올 때 비교적 조용히 휴식을 취하기 가장 좋은 구역이어서 미리 장소를 살펴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계곡이 깊기 때문에 길 가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물가에 앉아서 두런두런 얘기 나누기에 정말 좋은 구간.
자리 펴고픈 네번째와 다섯 번째 너럭바위 폭포
네 번째 폭포는 시더 런 트레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폭포인데 좌우의 커다란 바위 사이로 경사각 80도에 가까운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진다. 이 폭포가 떨어지는 곳은 그 물색깔이 여느 부분과 다르기 때문에 멀리서 보아도 깊이가 무척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트레일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폭포가 이 친구이다. 이 폭포 아래쪽에 자리를 펴고 앉아서 폭포를 바라보면서 한 잔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는데 그렇게 흐뭇할 수 없다.
마지막 다섯 번째 폭포는 네 번째 폭포의 바로 위에 있다. 이름을 붙인다면 ‘너럭바위 폭포’쯤이 되겠다. 경사가 완만하고 옆으로 넓게 퍼진 커다란 돌덩이 위로 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여름날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폭포인데 그 이유는 이 너럭바위 중간에서 부터 물을 타고 폭포 끝의 연못으로 떨어지는 미끄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을은 가을대로 바위 위에 내린 낙엽, 물위를 떠다니는 낙엽, 바위에 붙어있는 낙엽을 지켜보는 것도 좋다.
다섯 번째 폭포를 지나 더 위로 올라가면 수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물줄기도 가늘어진다. 그러다가 물이 두 줄기에서 하나로 합해지는 곳을 만나게 되는데 거기까지만 가보았다. 그 위로는 더 이상 폭포가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어느 날 문득 떠나지”
선배 중에 한 분이 카톡으로 그런 글을 보내온 적이 있다. ‘다들 바쁘게 살지.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떠나지.’
봄에 벚꽃을 볼 때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벚꽃을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선배의 그 글을 보면서 그 농도가 더 짙어졌다. 자, 이제 가을도 끝자락이다. 이 계절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맞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문득 떠나는 그 어느 날이 오기 전에 한 번쯤은 털고 나가서 계절의 내음을 맡아볼 일이다.
여행메모
-화이트 오크 캐년 주차장 좌표: 북위 38.538512 (N) / 서경 78.347954 (W)
-애난데일에서 화이트 오크 캐년 주차장까지: 86마일 정도, 대략 1시간 50분
-주차장에서 첫 번째 만나는 폭포까지 걸리는 시간: 30분
-주차장에서 다섯 번째 만나는 폭포까지 걸리는 시간: 1시간 30분
-다섯 번째 폭포에서 주차장까지 내려오는데 걸리는 하산 시간: 1시간 10분
-주의: 600번 지방도를 따라 화이트 오크 캐년 주차장 가까이에 가면 왼쪽에 10달러 표지가 있는 주차장이 있는데 이곳은 사설 주차장이다. 여기서 5분도 못가서 왼쪽에 국립공원 관리의 화이트 오크 캐년 무료주차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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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스프링필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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