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1850년 노예 320만명
18세기에 남부의 많은 저명인사들이 편의상 노예제도를 묵인했으나 원칙적으로는 이 제도에 반대했다. 노예 소유자였던 워싱턴과 제퍼슨도 노예제도에 반대했고 존 랜돌프는 자신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론은 흔히 개인적인 이익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왜곡된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남부의 이익과 이론을 동시에 변모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엘리 휘트니가 발명한 조면기가 출현한 것이다.
조면기 덕분에 면화는 남부의 유일한 주요 산물로 자리 잡았다. 면화 재배는 많은 노예를 부리게 했을 뿐 아니라 이들을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때까지 노예제도에는 노예의 작업에 감독이 필요하다는 점, 노예들이 우둔하고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점 등의 경제적인 결점이 있었다. 하지만 면화 재배는 일이 쉬웠고 조면 기계가 등장하면서 1년 내내 작업할 수 있다는 이점을 제공했다. 여기에다 목화 나무는 키가 작아 감독하기가 수월했다.
노예 부양비는 연평균 약 20달러로 자유노동자보다 훨씬 저렴했다. 그러다 보니 1800년 이래 노예 수가 20년마다 곱절로 늘어 1850년에는 320만 명을 넘었다. 더불어 노예의 시세가 올라 1780년에는 젊고 건장한 흑인 남자가 1인당 200달러였고 1818년에는 1,000달러, 1860년에는 1,200~1,800달러에 달했다. 이것은 ‘일을 잘하는 일류 노예’의 값이고 평균가격은 이보다 낮았다. 1850년에는 노예 인구의 총 가격이 약 25억 달러로 평가되었다.
-남부의 상류계급과 노예 100명
단일 작물을 연작하면 농토가 황폐해져 토지가격이 급속히 떨어졌기 때문에 남부에서 노예는 최대 자산이었다. 1808년 이후 노예 수입이 금지되면서 노예의 시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에 따라 남부의 주민은 노예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점차 강력한 공동전선을 펴기 시작했다.
남부 사회의 상류계급은 100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한 대지주로 구성되었다. 약 1,800명에 달하는 이들은 빈객 환대, 명예심, 부인에 대한 예절 및 존경 등을 특색으로 하는 사회를 구성했다. 그 아래 계급으로 50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한 약 6,000명의 지주가 있고, 10명 이상을 소유한 약 5만 2,000명이 그 밑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명에서 아홉 명의 노예를 소유한 약 25만 5,000명의 지주가 있었다.
-흑인들에도 계급이
영국의 중산계급이 귀족의 권위와 특권을 동경하듯 이들 중소 목화 재벌들은 상류계급 농장주의 화려한 생활을 동경하며 자기들이 사는 지방을 사랑하고 양키를 미워했다. 흑인들까지도 그런 주인과 가족 그리고 그들의 대저택에 존경과 애정을 느꼈다.
남부 사회에서는 교회도 노예제도의 비참한 실태에 눈을 감았고 세칭 도덕가들도 농장주들이 아름다운 혼혈소녀를 정부로 삼는 것을 웃어넘겼다.
사실은 흑인 중에도 백인들처럼 계급이 있었다. 주인집에서 태어나 그 집 아이들과 함께 자란 흑인 하인들은 개화되었고 대우도 좋았다. 도시의 노예에게도 어느 정도 자유가 있었고 때론 주인을 떠나 자기 일을 할 권리도 누렸다. 농업 노예가 가장 비참했고 다른 두 계급의 흑인들마저 그들을 하대했다. 간혹 농업 노예의 생활수준이 북부의 공장 노동자보다 좋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북부에서는 이런 말을 듣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북부 “노예는 야만적 제도”
북부에서는 노예제도에 대한 평판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도의성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뉴잉글랜드의 소농가는 다양한 영농을 하고 있어서 노예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선거권이 없는 노예 인구를 기초로 남부에 배정한 하원의원 정원을 대단히 부당하게 여겼다. 50명의 노예를 소유한 지주는 혼자 31표를 가질 수 있었다. 이 규정은 사실상 비합리적이고 불쾌한 일이기도 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독일에서 새로 건너온 이민자들은 노예제도란 시대에 뒤떨어진 야만적인 제도라고 생각했다. 북부는 노예주가 이 나라를 제압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새로운 주가 연방에 가입할 때마다 북부와 남부는 서로 충돌했다. 미주리가 노예주로 연방에 가입하려 했을 때 북부는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메인 주를 자유주로 가입시킬 것을 요구했다. 대립의 양상은 날이 갈수록 험악해졌다.
1820년까지는 남부에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언행을 할 수도 있었다. 자금을 모아 노예를 산 뒤 아프리카로 송환하는 단체까지 있었다. 한데 1820년 이후에는 목화 재배자의 압력, 경제적인 필요성, 특히 북부의 비난에 따른 분노 때문에 노예제도 반대 의견을 내는 게 위험한 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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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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