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령 지산동의 대가야 고분군.
은퇴한 지 꼭 10년이 되는 해, 2016 늦은 가을에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찾아간 여행지보다 제자와 함께 한 여행, 바로 그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가면 동생들과 만나는 기쁨, 친척들과 만나는 기쁨, 제자들과 만나는 기쁨, 친구들을 만나는 기쁨이 많지만 제자들과의 여행은 참으로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서울시립대에서 가르칠 때 제자들과 한국의 산을 오르던 추억보다 이번 여행은 더 뜻 깊었습니다.
저는 대구에 살고 있는 제자 석명희에게 이번 여행에서 가야문화를 탐방하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그 제자는 대구 기차역에서 우리 내외를 마중해 좋은 호텔로 우리를 “모시지” 않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노부모를 돌보기 위해 소방관 높은 자리에서 조기은퇴하고 낙향한 제자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제자는 우리들을 한증막으로 데리고 가서 여독을 풀게 하고 그녀의 공부방에 우리를 재웠습니다.
이튿날 그녀는 우리들을 데리고 대가야의 수도 고령을 찾아갔습니다. 대구에서 고령까지 먼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우리들은 선사시대의 암각화를 보았고 대가야 고분군을 보았습니다. 야산이 모두 고분군이었습니다. 고령이 대가야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도 대가야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뜻을 모아주기 바란다고 대가야 박물관 직원은 말했습니다.
거기서 아래 시 한편을 얻었습니다.
조국의 산하에는 아직도 우리가 다 캐내지 못한 역사가 지하에 숨어 있는 듯 했습니다.
제자는 우리를 가야산 해인사까지 안내해주었습니다. 아내가 그때까지 해인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해인사 8만대장경을 둘러보고 대웅전 아래 탑돌이도 하고 내려왔습니다.
절 아래에서 진주에서 올라온 이태삼 박사에게 우리를 인계하고 그 제자는 대구로 돌아갔습니다. 이 박사는 서울시립대 대학원 토목공학과 출신으로 콜로라도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얻을 즈음 버지니아 우리 집에 와서 며칠 머물기도 했고 저가 덴버에 들렀을 때 저의 호텔 방에서 며칠 함께 지내기도 한 제자였습니다. 그가 진주 경상대학의 중견 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전-진주 고속도로로 빠져나가 진주에 도착했을 때 그의 가족과 조교들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늦은 저녁식탁을 함께 하며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았습니다. 어린 아이 둘의 아빠가 된 제자를 바라보는 뿌듯함, 사제지간의 정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10년이란 세월이 제자를 이렇게 성장시킨 세월이라니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남강댐 상류의 최고급 호텔에서 잠을 자고 난 아침 창밖의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며 아침식사를 즐긴 후 경상대학으로 갔습니다. 남강댐과 수자원 관리의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고 저는 저의 소견을 발표했습니다.
경상남도의 물 부족 문제가 지난 10년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물의 국유재산을 동네재산으로 알고 있는 한국인의 의식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리산의 물을 부산지역과 나누어 쓰는 정책은 아직 어려운 듯 했습니다. 대구-부산 지역의 물을 낙동강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워서 물의 긴축정책과 함께 수량공급을 늘려야 합니다. 남강댐이 만들어져서 하류가 피폐해졌다는 논의가 나왔습니다. 물이 곤궁한 한국에서 댐은 필수적입니다. 여름 장마를 가두어 가을, 겨울, 봄에 사용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오후에 버스로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부산에 내리니 시인 양왕용 교수가 마중을 나와서 해운대 호텔로 들어가 짐을 풀고 달맞이 고개를 넘어 바다생선 식당으로 가서 그의 부인과 다른 시인들과 함께 바다위에 뜬 달을 보며 저녁식사를 즐겼습니다. 거기서 신라의 최치원이 남긴 해운대라는 시 한편을 오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식사는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즐겼습니다. 연대 후배 정영자 교수가 우리들을 위해 대접한 식사는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언제나 따뜻한 후배를 둔 행운을 감사했습니다. 아침식사 후 해운대 미술관에 들러 이중섭 미술을 감상했습니다. 그는 민족 화가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가난한 시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그의 미술이 거의 모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양산 통도사를 제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해 양 시인 내외와 친지가 수고해주셨는데 통도사도 제 아내의 초행길이었습니다. 한국 3대 사찰의 둘을 이번 여행에서 돌아보았으니 큰 행운이었습니다.
점심식사는 대구 2군사령부 시절 만난 강위석 장로(시인)와 만나기로 했는데 그 분을 한 시간 이상 기다리게 한 죄가 컸었습니다. 저는 소위였고 그 분은 일등병이었지만 저보다 두 살 쯤 윗분이었습니다. 그는 긴 시간 기다려주셨고 다른 약속이 기다리고 있어서 얼굴만 대하고 떠났습니다. 아쉬었습니다.
점심 후 부산을 조감할 수 있는 언덕에 올라 한국전쟁 피난시절 살았던 서대신동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는 알아볼 수 없는 고층 아파트촌이 거기 있었습니다. 바로 아래 영도다리가 보이고 새로 개발되고 있는 부산이 거대도시를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부산도 자동차 길이 막혀서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녁식사는 광안리 최고의 횟집 해촌에서 제자 김성곤 부산 소방본부장이 대접해주었습니다. 대구에서 명희가 내려와 그 저녁이 더 빛났습니다. 밤바다가 도처에 있었습니다. 어두운 바다표면이 은빛으로 보이는 시간에 작별을 나누었습니다.
대구-고령-합천-진주-부산으로 이어지는 늦가을 한국여행은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관계가 만들어낸 잊을 수 없는 2016년의 한폭의 수채화가 되었습니다.
대가야
가야금을 알았어도
오동나무를 파서 열두 개의 현으로 만들어진 가야금이
우륵이 작곡한 12곡이 가야왕 가실의 왕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알았어도
그가 지금 고령땅의 대가야 악사이었음을 몰랐어라
그냥 신라사람으로 알고 있었으니
마모된 양전동 암각화가 아득한 선사시대 사람들의 미술인지 몰랐어라
6000년전, 7000년 전 동해바다로 고래사냥을 나갔던
선사시대 사람들의 울산 암각화를 알았어도
지금 고령 땅의 대가야 문화유산은 몰랐어라
부끄러워라 내 천박한 역사 지식
2010년 704기의 지산동 고분군이 확인되면서
우리들은 신라와 백제 사이
가장 오래 버틴 대가야를 알게 되었어라
거창에서 하동, 순천, 남원까지 전성시대 영토를 자랑했던 왕국을 몰랐어라
경주 고분보다 더 큰 무덤 속에서 나온 토기들, 청동기 그릇들, 칼과 갑옷,
금관, 금동관, 은관, 금귀고리
그보다 더 큰 순장된 하인들의 40여기 돌무덤이
가련한 사람들의 죽음이
이 세상을 잉카, 마야문명보다 더 놀라게 했어라
잃어버린 왕국은 언제나 무덤인지 모르는 무덤 속에서 발견되나니
역사는 흙 속에, 바람 속에 감추어져
아직 숨 쉬고 있나니
도적들이 끝내 훔쳐갈 수 없는 흙속에, 바람 속에 그대로 숨 쉬고 있나니
<
글, 사진/ 최연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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