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기문 총영사가 1989년 메릴랜드 한인의 날 행사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국에 ‘반풍(潘風)’이 확연하다. 10년의 뉴욕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74)이 일으킨 노회한 날갯짓이다. 대통령 선거 출마가 확실시 되는 그의 행보에 워싱턴 한인사회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80년대와 90년대, 두 차례나 워싱턴의 주미대사관에 봉직하면서 깊은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선 꽃길을 밟든, 날선 공세에 꺾이는 허망한 할미꽃이 되든 반기문은 워싱턴의 올드 타이머들을 매료시킨 드문 외교관이었다. 그 추억과 인연의 시간을 되새김질 해본다.
80년·90년대 두차례 대사관 봉직
정부-한인사회간 윤활유 역할 잘해
귀국후에도 애로사항 해결, 감명 줘
권위주의 벗고‘진심 관계’…아직 연락
30년 전, 뜨겁던 여름이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을 향한 국민들의 6월 항쟁이 6.29선언으로 이어진 직후 껑충한 키에 마른 체형의 한 외교관이 워싱턴에 부임했다. 40대 초반의 약여(躍如)한 그는 반기문(潘基文) 11대 총영사였다.
동포사회에 반정부 분위기가 팽배하던 그 시절, 반 총영사는 여느 외교관과는 다른 면모로 한인들에게 다가왔다.
1980년대 말 반 총영사와 손발을 맞추었던 오석봉 전 워싱턴한인회장은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 노태우 대통령 시대로 전환되는 시점으로 미국 조야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나쁘고 동포사회에도 반정부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며 “반 총영사는 부임하자마자 그 기류를 빨리 파악해 적절한 직무 수행으로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고 정부와 한인사회 관계에서 윤활유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오 전 회장은 이어 “반 총영사는 대사관 직원들과 한인들과의 배구대회를 만들어 직접 출전할 정도로 마음과 몸으로 동포사회를 배려한 분”이라며 “그때의 성실성과 인간미가 유엔 사무총장까지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을 것”이라고 평했다.
당시 메릴랜드 한인회장을 지낸 정천용 선여행사 전 대표는 반 총영사에게서 신망의 사나이란 기억을 갖고 있다.
“총기사고가 잦아 볼티모어 경찰국장을 면담했는데 어떤 한인이 한국 친선방문을 해준다고 해놓고 아직 소식이 없다고 말해 무척 당황했습니다. 한인사회가 망신당할 것 같아 반기문 총영사를 만나 협조를 구했어요. 근데 그 분이 미주국장으로 영전되어 귀임하게 돼 난처하게 됐는데 서울 가더라도 노력해보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몇 개월 속을 태우고 있는데 서울시경 국장이 볼티모어 경찰국장 초청장을 대사관으로 보내왔습니다. 근무지를 떠난 후에도 애로사항을 잊지 않고 해결해주는 외교관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반 총영사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잊을 수 없는 분이지요.”
1987년 8월 부임한 그는 90년 7월까지 꼬박 3년의 임기를 채우며 특유의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동포사회의 신망을 얻었다. 외교부에서 ‘반 주사’란 별명처럼 워낙 꼼꼼한 성격이었지만 그는 살가운 언행으로 한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반기문 총영사가 당시 오석봉 워싱턴한인회장, 정천용 메릴랜드한인회장 등과 오션 시티로 낚시여행을 떠나 기념촬영을 했다.
‘호남향우회 사건’도 그 중의 하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 항쟁 이후 반정부 색채의 호남향우회와 전두환 정권의 대사관은 기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다. 서로 얼굴 볼일 없는 오랜 ‘적대적 관계’를 청산한 주인공이 바로 반 총영사였다. 호남향우회 총회와 5.18 기념식에 총영사로는 처음 참석한 것이다. 비록 노태우 정부로 넘어온 시기였지만 그의 친화력 덕분에 공관과 호남향우회의 관계는 ‘해빙’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인 단체장들과의 관계뿐만 아니었다. 일반 한인들과의 만남에서도 그는 권위주의를 뺐다. 스스럼없이 만나 대화를 나누고 애로사항을 청취하면서 거리감을 없애고 다가섰다. 술좌석에 참석하게 되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취한 한인들을 자신의 승용차로 집까지 데려다주는 등 숱한 화제를 남겼다.
반 총영사는 90년 외무부 미주국장, 92년 2월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에 이어 그해 9월 주미공사로 다시 워싱턴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그는 제1차 북핵 위기를 맞아 한미간 대북 정책 조율의 실무 책임자로 94년 제네바 합의가 도출될 때까지 열정을 바쳤다. 95년 2월 본부 외교정책실장으로 귀임하며 공식적인 워싱턴 생활은 마감했다.
본국으로 귀임하면 공관 근무시절 맺은 동포들을 형식적으로 대하는 일부 외교관과 달리 그는 한국으로 가서도 그 진심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워싱턴의 지인들과 전화나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는 등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문흥택 전 워싱턴한인연합회장도 오랫동안 반 총영사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인물 중의 하나다. 그는 “2000년대 중반쯤인가 서울에서 반기문 장관에게 연락이 왔는데 워싱턴 총영사로 어떤 분이 부임하시는데 잘 도와달라고 당부하시는 거였다”며 “외교관 후배를 챙기고 공관과 동포들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 애쓰시는 그분의 마음을 잊을 수 없다”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2004년 외교부장관에 취임 후 그가 워싱턴을 찾았을 때, 1백여 명의 동포들이 우래옥에서 환영연을 베풀어 따뜻이 맞아준 것도 그런 각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그가 2006년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워싱턴 한인들은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축하를 보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30년간의 두터운 정을 잊지 못하는 워싱턴의 올드 타이머들은 아직도 ‘반 총영사’ 이야기를 곧잘 꺼내곤 한다. 그리곤 대선이란 진흙탕의 여정으로 걸어가는 그를 안타까운 애정의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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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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