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남부동맹의 급소
북부의 전략 목표는 무엇인가? 남부 전역을 정복하는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지방을 점령하는 데는 상당한 대군이 필요했다. 대군을 징집, 훈련, 보급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도 리치먼드를 점령하는 것은 어떨까? 리치먼드는 경계선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작전이 손쉬울 것 같았지만 바꿔 말하면 워싱턴의 조건도 똑같다고 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리치먼드 점령은 중요하긴 해도 수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것으로 남부의 항복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남부동맹의 진짜 급소는 수송로를 지배하는 몇몇 요지였다. 남부의 주들은 주요 농산물 생산이 빈약했기에 식량을 대부분 오하이오 강 이북의 여러 주에서 수입했고 남부의 원료용 농산물을 외국에 수출해 군수물자, 무기, 탄약, 의약품, 기타 공업제품을 수입했다. 서부와의 교통에는 세 개의 철도가 있었는데 이 철도는 각각 멤피스, 빅스버그, 뉴올리언스 지점에서 미시시피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 세 도시를 점령하면, 즉 오하이오 강과 미시시피 강 유역을 침공해 남부동맹을 양단하고 해양까지 봉쇄한다면 승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3만명의 지원병과 훈련
하지만 북부는 훨씬 이후까지 이 작전을 착안하지 못했다. 1861년의 연방군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신병을 징집해 훈련시킬 것, 워싱턴을 지키고 리치먼드를 점령할 것, 유력한 남부인이 다수 거주하는 켄터키 주와 미주리 주를 확보할 것, 무엇보다 남부의 항구를 봉쇄할 것 등이었다. 독립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군대 이동은 거리 관계와 보급 문제 때문에 육로보다 해로가 용이했다.
워싱턴에서는 벌써 3만 명의 지원병이 술렁거리며 “리치먼드를 치자!”고 외쳐댔다. 그들의 열망을 억제하기는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군 지휘관들은 훈련을 위한 유예기간을 요청했으나 정부는 여론에 휘말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훈련이 부족한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저쪽도 훈련이 부족하기는 우리와 마찬가지다.”
-전쟁 구경따라 나선 아내들
스코트도 할 수 없이 굴복해 버지니아로 진격할 준비를 서둘렀다. 서부 방면으로는 패터슨 장군이 셰넌도어 강 유역으로 갔고, 동부 방면에서는 어빈 맥도웰 장군이 3만 명의 육군을 거느리고 남부를 향해 포토맥 강을 건넜다. 동맹군은 워싱턴에서 남서방으로 약 30마일에 있는 불런 강변에 포진하고 매너서스에서 철도 교차점을 방위했다. 군대는 흡사 소풍을 가듯 출격했고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상하 양원 의원은 “하나님이 그들 수중에 필리스틴(Philistines: 유대인의 적)을 인도하시는 것”을 보겠다는 기대를 품고 부대의 뒤를 따랐다. 반란군은 이제 산산조각이 날 판이었고 쌍안경까지 가져온 한 귀부인은 들떠서 말했다.
“우리는 내일 리치먼드로 들어갈 거죠?”
적지 않은 농부가 아내와 음식을 가득 담은 광주리를 마차에 싣고 전쟁을 구경하겠다고 모여들었다. 서로 훈련이 부족한 양군으로서는 수비를 하는 편이 유리했다.
-패주병으로 꽉찬 워싱턴 거리
그런데 셰넌도어 강 골짜기에서 남부동맹군의 지원병이 나타나자마자 북군은 패전했고 곧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후퇴하기 시작했다. 마차와 기마가 줄을 지어 달렸고 구경꾼들은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내달렸다. 기병은 군도를 휘두르며 “돌아가라, 우리는 싸움에 졌다”라고 외쳤다.
워싱턴 거리는 대열을 잃은 연대 병사로 꽉 찼고 술집이란 술집은 흙투성이, 피투성이 군인으로 자리가 없었다. 만약 남군이 패주병을 추격했다면 워싱턴을 점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스코트뿐 아니라 링컨까지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러나 북군이 패전으로 혼란에 빠졌듯 남군도 승리로 질서를 잃었기에 불런 전투에서는 피차 결정적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무기는 유럽에서 수입
불런 전투 후 포토맥 강변은 평온했다. 양쪽 군 모두 대군을 편성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지원병이 떼를 지어 모여들었고 양쪽 군대는 무장을 전적으로 유럽에 의존했다. 북부는 베어링브러더스 회사를 통해 영국에서 무기를 구입했다. 그런데 연방정부가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바람에 오하이오,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각 주가 제각각 서로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주문을 했다. 벨기에의 모든 공장은 남부를 위해 무기를 생산했다.
화물을 받아들이려면 항구가 필요했는데 전통적으로 선주들의 연고지는 북부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덕분에 북부는 남부에 비해 10 대 1로 우세한 함대를 거느렸다. 그러나 남부도 그에 못지않게 대담하고 교묘하게 움직였다. 전쟁 초기 남부인은 노퍽에 있는 해군 조선소를 점령하고 구축함 메리맥 호의 선체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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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번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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