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스톤월 잭슨의 전공
당시 제퍼슨 데이비스의 군사고문이던 리 장군은 대담한 견제 활동으로 북군이 진지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려고 ‘Stonewall Jackson’이라 불리던 유능한 부관 토머스 잭슨을 셰넌도어 계곡으로 보냈다. 잭슨은 적군을 닥치는 대로 소탕하고 포로 3,000명과 2만 5,000달러에 달하는 보급물자를 노획해 6월 리치몬드에 주둔하던 리 장군의 본대와 합류했다. 매클레런은 이 공격으로 리 장군이 적어도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리라고 추정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잭슨을 따로 파견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리 장군이 자신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샅샅이 파악해 작전을 짰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리 장군과 매클레런
드디어 리치먼드의 전방에서 소위 ‘ 7일 전쟁 The Seven Day’s Battle’이란 혈투가 벌어져 리 장군은 2만 명 이상의 사상자와 실종자를 냈고 매클레런 장군은 약 1만 6,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매클레런은 또 한 번 리치먼드를 점령할 기회가 있었지만 후퇴 명령을 내려 다수의 무기와 차량을 남군에게 남긴 채 철수했다. 이 우유부단한 장군이 대육군을 포토맥 강변까지 끌고 돌아왔을 때 그는 사령관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후임 사령관도 변변치 않아 제 2차 불런 전투에서 패했고 남군에게 메릴랜드로 침입할 길을 터주고 말았다. 이 때문에 매클레런이 재임명되어 앤티텀에서 리 장군을 저지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
앤티텀의 전투로 남군의 침공을 저지하면서 북군은 열세에서 다소 벗어났다. 그 무렵 링컨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남군을 격파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도 같은 의견이었고 리 장군이 볼티모어를 점령하면 남부동맹을 승인하려 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자신이 지지하는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 황제에게 멕시코의 왕위를 주고자 남부와 우호관계를 수립하려 했다. 이에 따라 남부동맹의 주 프랑스 대사인 존 슬라이델에게 남부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나폴레옹 3세는 그의 친지인 보르도의 조선업자 루시앙 아르망에게 남부동맹을 위해 순양함 2척, 군함 4척을 건조할 것을 비밀리에 인가했다. 그 후 북군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그는 배의 인도를 금지했다. 이 사건은 다른 사건과 함께 프랑스의 조선업자를 파산하게 만들었다. 영국의 경우에는 노예해방이 여론을 역전시킬 유일한 방법이었다.
-1863년 새해 선언
그러나 링컨이 노예해방을 결정하는 데는 오랜 시일을 걸렸다. 그는 이 전쟁을 평화협상으로 마무리할 생각이라 미비한 조치로 노예 소유자를 자극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실상 북군 점령 지역에서 노예는 해방되었고 그들은 군에 속하는 노무부대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링컨은 항상 노예제도는 연방 수호와 관련될 경우에만 중요할 뿐이며 연방에 소속된 노예주의 형편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슈어드는 링컨에게 노예해방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앤티텀 전투 이후인 1862년 9월 링컨은 각료 전원을 소집한 자리에서 그들과 협의하지 않고 행동을 개시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메릴랜드를 수복하는 대로 노예를 해방시키겠다고 다짐했다. 하나님께서 맡으신 일은 이미 다 이루었으니 이제 링컨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시행해야 했다.
그는 의회와 협의하거나 연방에 잔류한 여러 주에 계획을 알릴 생각이 없었고 대통령이 적지에서 총사령관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으로 처리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1863년 1월 1일부터 연방에 반역한 주에 거주하는 모든 노예는 영구히 자유이며 연방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승인한다는 예비선언을 공표했다.
-남부의 결사항전
1월 1일 링컨은 획기적인 노예해방 선언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이 문서에 서명했을 때만큼 확신을 가지고 내 권리를 행사한 적이 없었다.”
기쁨에 들뜬 각료들은 장난삼아 서로를 노예 폐지론자라고 불렀다. 며칠 후 제퍼슨 데이비스는 남부동맹 의회에 전달하는 교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저주받아야 할 법령에 서명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증오는 그 법령이 내포하는 실현 가능성 없는 무기력한 희망을 경멸함으로써 풀어졌다.”
선언의 결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재산과 사회 양식이 소멸될 것을 우려한 남부가 한층 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겠다고 뭉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북부도 이 법령으로 각오를 새로이 할 것이라고 예측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폐지론자들은 그들의 이념에 대한 때늦은 추종이라고 생각했고 북부의 민주당원들은 정치적인 제스처라고 비난했다. 오로지 노예만 자유를 처음 호흡하면서 흥분을 느꼈다.
<
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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