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수 있다’…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4
▶ ■ 한인사회 분위기는 어땠나?
본보는 코리아 게이트에 관한 안홍균 씨의 증언을 기획 시리즈로 연재한다. 안 씨는 이번 증언을 통해 코리아 게이트를 둘러싼 한미 간의 숨막혔던 긴장과 갈등의 역사적 시간들을 재구성할 예정이다. 또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동선, 김형욱, 김한조와 김상근, 손호영 등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에 관한 숨은 스토리와 에피소드들도 소개한다.
한인들 반유신 대규모 시위 벌여
-70년대의 이민 러시
코리아 게이트 전야 당시는 한국인들이 미국에 갓 이민 와서 정착하기에 바쁠 무렵이었다. 1970년대 초반 워싱턴 지역에 사는 한국인들은 3천명 안팎이었다. 불과 몇 년 전인 60년대까지만 해도 1천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다 케네디 대통령이 발의하고 1967년 존슨 대통령이 서명한 새 이민법이 발효하면서 한국에서 이민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선망의 나라였다. 미국 이민이 마치 출세하는 것처럼 비쳐졌다.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태평양을 건넌 한인들은 이 신천지에서 정착하기 위해 힘겨운 생존 투쟁을 벌였다. 한국인 이민자들은 흑인촌에서 강도와 싸워가며 일을 배웠다. 하루 12시간씩 주 7일 내내 일을 하며 미국 땅에 뿌리를 내리려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부모들이 생업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공립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못 알아듣는 영어와 힘든 사투를 벌어야 했다. 한인 아이들은 수학과 물리, 화학 과목에서는 천재적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영어와 작문, 역사 같은 수업시간에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선생님들은 이 ‘이상한 학생’들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3선 개헌 반대시위
이즈음 미국의 공항에는 한국인들로 붐볐다. 앞서 이민 온 한인들은 이제 막 한국에서 이민 오는 친지들을 맞으러 공항으로 달려 나갔다. 해마다 한국 이민자들이 몰려오면서 교포사회의 덩치도 커졌다. 덩달아 유학생 수도 늘면서 작지만 한국 그로서리도 생겨났다. 한인 커뮤니티가 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막 떠나온 모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불길한 내용뿐이었다. 삼선개헌과 유신에 이어 인권탄압과 독재 같은 흉흉한 소식에 한인들은 비분강개했다. 모국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의 한편으로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발감도 확산됐다.
한인들은 고국을 위해 할 일이 뭔지를 찾았다. 그리고 민주화를 소망하며 워싱턴 거리로 나섰다.
1969년 7월25일 유학생들은 주미대사관의 한숙 공보관장이 발표한 삼선개헌 특별담화문을 보고 ‘3선 개헌 반대 재미 한국인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장에는 조지 워싱턴대 김광서 교수가 선출됐다. 이들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모금 및 서명운동을 벌였다.
박정희와 닉슨 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을 며칠 앞둔 8월18일에는 D.C.의 듀퐁 서클에 유학생들과 교포들이 모여 대사관까지 행진하고 항의문을 제출했다. 백악관 앞에서도 시위를 이어갔다.
- 유신 반대 시위에 3천명중 450명 참석
1972년 10월17일 박 정권이 유신을 선포하면서 한인들은 다시 워싱턴 거리로 달려 나왔다. 11월5일 듀퐁 서클에서 ‘민주수호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국내외를 통틀어 유신에 대한 첫 반대집회였다. 김웅수 전 6군단장이 주도하고 김상돈 전 서울시장, 임창영 전 유엔대사, 전규홍 전 서독대사 등 명망가들도 참석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다음날, 반 유신 시위에 450명이 참가해 한국 대사관에 결의문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한인인구 3천명 가량에 450명이 참가한 것은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그만큼 유신정권에 대한 동포사회의 반감은 컸다.
얼마 뒤인 73년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해 시끄러웠다. 이번에는 2백여 명의 한인들이 메리디안 힐 공원에 모여 납치 규탄대회와 함께 처음으로 자동차 시위를 벌였다. 100여대의 자동차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 백악관과 주미 한국 대사관 근처를 돌았다. 자동차 유리에는 “박 정권 물러가라” “한국 정보원을 축출하라”는 구호가 붙어 있었다. 거리의 미국인들은 신기한 듯 차량 데모 행렬을 지켜보았다.
-KCIA의 협박
한인들이 반 유신 시위를 하면서 한국 정부의 대응도 가팔랐다. 주미대사관의 중정 요원들은 시위 참가자들이나 반정부 교포들을 감시하고 겁박을 주었다. 유학생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KCIA 사람들이 주사를 한방 놓고 기절하면 한국으로 끌고 간다더라.” “찍히면 한국에 영영 못 들어간다더라.”
그런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유학생들 사이에 떠돌았다.
삼선개헌과 반 유신 집회에 참석했던 나도 요주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한번은 워싱턴 유학생회 회장이던 Y를 만났다.
“안 형. 조심해. 그들이 당신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 있어.”
섬뜩했다. KCIA는 그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다.

1972년 11월 5일 듀퐁서클에서 벌어진 반 유신 시위. 워싱턴포스트는 이 시위에 한인 450명이 참가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워싱턴지역 한인은 3천명 가량이었다. 앞줄 왼쪽부터 김응창, 안병국, 김웅수, 김상돈, 정기용.
-김대중과 계란투척 사건
그러나 한인들은 미 당국을 신뢰할 수 없었다. 미 당국이 소수계 이민자들에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인식 때문이었다. 한인들에 문제가 생겨도 미 당국이나 법이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그러다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는 사건이 터졌다. 유신이 선포되자 일본에 체류하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은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의 망명보다 앞선 1차 망명이었다.
김대중은 1973년 7월 워싱턴의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 발기대회를 열었다. 해외를 망라한 조직이었다.
한번은 김대중이 미국에서 시국강연을 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연설을 막으려 계란을 던지는 방해공작을 폈다. 야유도 해댔다. 대담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미국 내에서 그런 공작을 펼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국무부에서는 즉각 한국 정부에 항의하고 경고를 보냈다. 그 보도를 보면서 한인들 사이에는 새로운 희망이 생겨났다.
“이제 우리도 미국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겠구나.”
-잔디밭 급수 사건
미국 언론의 한국 때리기의 또 다른 피해자는 미국에 사는 한인들이었다. 미국 내의 반한(反韓) 여론이 비등하면서 한인들은 오명(汚名)을 뒤집어 써야 했다. 고개를 들고 다니기 힘들 정도로 수난의 시대였다.
박동선 사건이 한참 미국을 달굴 때였다. 박 씨 성을 가진 한인들에게 미국인들은 농을 던졌다. “너도 박동선이냐?”
무심코 던진 농담이지만 한인들은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어른들뿐만 아니었다. 한인 학생들도 학교에서 이유 모를 수모를 견뎌내야 했다. 미국 학교에서는 스승의 주간에 학생들이 교사한테 사과나 사탕, 초콜릿 같은 작은 선물을 주며 감사를 표하는 이벤트가 있다. 한 한인 학생도 여느 아이들처럼 선생님한테 사과를 내밀었다.
“한국 아이가 주는 뇌물은 안 받는다.”
교사는 학생이 내민 사과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매몰찬 선생님의 태도에 한인 학생은 풀이 죽어 지내야 했다. 한인 학생이 학교에서 당한 수치스런 소문이 한인들 사이에 쫙 퍼져 나갔다.
급수 사건도 있었다. 1976년 워싱턴은 심각한 가뭄에 시달렸다. 페어팩스 카운티를 비롯해 대다수 관공서에서는 급수제한을 실시했다. 잔디밭에 물을 뿌리지 말라는 내용도 공고했다. 영어도 짧고 미국 사정에도 어두워 급수제한 사실을 몰랐던 한 한인이 집 앞 잔디에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워싱턴포스트지가 그 사실을 보도했다.
“한인들은 가뭄의 급수제한에도 잔디에 물을 뿌리고 법을 어긴다.”
마치 법을 지키지 않는 범법자처럼 한인들을 매도한 기사였다. 코리아게이트 덤터기를 쓰며 난도질당한 한인들은 기가 죽었다. 한국이나 한인들 모두 한통속 취급을 받았다. 그게 당시 워싱턴의 분위기였다.
-창피해 못 다니겠다
미국 언론에서 연일 한국 두드리기에 나서자 한인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왜 미국 측에서 우방이라는 한국을 맹폭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몸은 비록 타국살이를 하지만 고국 걱정에는 한마음이었다. 이민 온 지 몇 년 되지도 않아 모국의 부끄러운 행태가 미 언론에 도배가 되고 있으니 그만큼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다.
“올 것이 왔구나. 유신에 인권탄압하며 잘못 하더니 결국 터졌구나.”
“정말 우리 한국이 큰일이다. 나라꼴이 이게 뭐냐. 창피해 못 다니겠다.”
“KCIA가 얼마나 못났으면, 다른 나라도 아닌 가장 우방인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겠나.”
워싱턴 지역의 한인들은 만나면 개탄을 금치 않았다. 교포들의 반 박정희 정권 기류 속에서 코리아 게이트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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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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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범법자취급하는놈들 Sue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