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8
▶ ■ 김형욱 청문회는 어떻게 진행됐나

김형욱이 상체를 뒤로 젖힌 채 통역하는 나를 응시하고 있다.
본보는 코리아 게이트에 관한 안홍균 씨의 증언을 기획 시리즈로 연재한다. 안 씨는 이번 증언을 통해 코리아 게이트를 둘러싼 한미 간의 숨막혔던 긴장과 갈등의 역사적 시간들을 재구성할 예정이다. 또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동선, 김형욱, 김한조와 김상근, 손호영 등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에 관한 숨은 스토리와 에피소드들도 소개한다.
-“저 새끼 제명에 못 죽어”
청문회의 날이 밝았다. 1977년 6월22일 오전 9시. 나는 서둘러 하원 레이번 빌딩으로 들어섰다. 9시45분부터 청문회는 시작되지만 2172호로 가는 복도에는 벌써 긴 줄이 형성돼 있었다. 코리아 게이트의 비밀을 폭로하는 역사적인 청문회를 지켜보기 위해 일반인들은 몇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감수했다. 의회 경찰들이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방청객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벌써부터 후끈거렸다. 세계 정보 분야 역사에 동맹국의 정보 총 책임자가 제 발로 나와 자기 정부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김형욱은 6년이나 스파이 총책으로 박정희 권부를 지키며 최고 정보를 다룬 사람이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세계가 이 청문회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전규홍 전 서독대사 등 반정부 인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또 주미 한국대사관 직원들과 KCIA 요원들로 보이는 짧은 머리의 사내들도 있었다.
행렬을 스치며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데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김형욱 저 새끼, 제명에 못 죽어.” 상고머리 사내였다.

김형욱이 자필로 쓴 청문회 성명서 원고.
-청문회장 옆에 차려진 아침의 ‘향응’
청문회장 옆방으로 들어가니 김형욱이 소파에 앉아서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옆에는 김재현 변호사가 있었다. 나와 경기중학 동기였다. 그는 일찍 도미해 워싱턴에서 변호사를 하다 당시는 뉴욕에 거주하고 있었다. 내가 조지워싱턴대 대학원에 다닐 때부터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방에는 아침 식사가 테이블 가득 차려져 있었다. 그동안 국무부 회의나 의회 행사에 자주 가보았지만 커피 정도가 전부였다. 이처럼 잔칫상 같은 성대한 ‘향응’은 처음이었다.
프레이저위원회에서 김형욱의 증언을 얼마만큼 비중을 갖고 임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다.
9시45분 김형욱과 청문회장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카메라가 오늘의 주인공을 향해 플래시 라이트를 터뜨렸다. 그 순간 누군가 김형욱의 어깨를 툭 치며 한마디 건넸다. “당신은 스타 증인이요.” 김의 얼굴에서 우쭐거리는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100석 가량의 2172호에는 취재진과 방청객들도 붐볐다. 동아의 이웅희, 조선의 김대중, 그리고 KBS 특파원 등 10명가량의 한국 기자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10여명의 일본기자들과 NBC, CBS, ABC, AP 등 미국 기자들도 눈에 띄었다. 증언대 앞에는 수십 명의 사진기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방청석 곳곳에는 경호원들이 배치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삼엄한 기류가 장내에 흐르고 있었다. 민주 5명, 공화당 의원 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 멤버들의 얼굴에도 나지막한 긴장감이 흘렀다. 의원석 뒷줄에는 프레이저위 스태프들과 각 의원의 보좌진들이 쭉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좌정하자 프레이저 위원장이 개회선언을 하고 모두 발언을 꺼냈다.
“이번 청문회는 프레이저 위원회가 하원으로부터 정식 조사권한을 받은 이후 첫 청문회이며 첫 증인으로 김형욱 전 한국 중앙정보부장이 나왔습니다.”
평소 냉정하던 그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마치 영화감독이 신작 발표회장에서 주연배우를 소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원 한미관계조사위에서 발급한 내 신분증.
-선서와 증인의 권리
프레이저 위원장이 나를 소개했다.
“국무부가 추천한 기록에 의하면 안 교수는 중립적 입장에서 프로페셔널하게 통역을 할 것입니다.”
나는 성실하고 정확하게 통역할 것임을 선서했다. 김형욱도 선서를 마쳤다.
미국에서 선서 문화는 한국이나 아시아권과는 확연히 다르다. 동양식 법철학이나 통념에서 선서의 의미는 미약하지만 10계명에 기초한 기독교 선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과 같은 무게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과 진실의 전부, 그리고 진실만을 증언한다. 하나님의 도움으로.”라고 선서를 하게 된다.
프레이저 위원장이 사족을 달았다.
“그러나 증인은 동시에 자기에 불리한 증언은 말하지 않은 권리도 있습니다. 수정헌법 제5조에 의해~”
증언의 의무도 있지만 말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방청석을 향한 경고의 일성도 잊지 않았다.
“오늘 청문회는 예민하므로 조소나 야유, 비방을 하면 퇴장시킬 것입니다.”
-청문회의 진행체계
김형욱이 준비한 자필 성명서의 영어 번역문을 내가 읽기 시작했다. 프레이저위에서 미리 번역해놓은 것이었다. 읽는 데만 30-40분이 걸릴 정도로 길었다.
청문회는 한 의원의 질문이 끝나면 의장인 프레이저 의원한테 마이크가 넘어 갔고 김형욱이 답변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모든 발언은 사회자인 위원장이 통제했다. 의장이 “뉴욕 출신의 00 의원(Gentlemen from New York)”이라며 질문할 의원을 호명하면 그 의원은 “Thank you, Mr Chairman”하고 인사를 한 후 발언을 시작했다. 의원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발언이 끝나면 다시 “Thank you” 라고 인사하며 자신의 발언이 끝났음을 알리고 다시 사회자에게 공을 넘겼다.
회의의 질서는 체계적이고 정중했다. 그게 미 의회의 전통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맞추되 만약 추가 시간이 필요하다면 다른 의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시간을 빌렸다.
사회자는 물론 의원들은 신랄한 질문을 할 때에도 태도는 매주 부드럽고 점잖았다. 의원들끼리 서로 응수하거나 비방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김형욱, 날 째려보다 상체 젖혀
나는 보다 정확한 통역을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썼다. ‘박동선’과 ‘박동선 씨’란 표현의 차이까지 살리려고 노력했다. 청문회장에는 한국 대사관의 외교관들은 물론 KCIA 요원들, 그리고 반정부 인사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또 미 의회 관계자들은 물론 일본 측도 예민한 촉수를 들이대고 내 통역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하나라도 잘못 하면 큰일이었다. 카메라는 돌고 있고 나의 통역 내용이 의회에 영구 기록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한국말의 모호성이었다. 김형욱은 비교적 정확하게 의사를 표현하려 했지만 간혹 주어가 생략되거나 명확치 않은 표현이 튀어나왔다.
통역을 할 때는 머뭇거리면 신뢰를 잃게 된다. 김형욱의 이야기는 마치 내 머릿속에 조판이라도 되는 듯 정리돼 노트를 하지 않고 기억만으로 통역을 해냈다.
김형욱은 처음에는 날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통역을 할 때 째려보는데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10분쯤 하다 그를 쳐다보니 내 통역 내용을 신뢰하는 듯 상체를 뒤로 젖히고 릴렉스한 자세로 청문회에 임했다.
너무 긴장해서인지 주변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질문하는 의원과 김형욱, 그리고 내 목소리만 들려왔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오전 3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난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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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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