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9
▶ ■ 청문회, 김형욱의 증언 내용

LA 타임스와 워싱턴 스타, 뉴욕타임스 등 미 주요 언론도 김형욱의 증언을 대서특필했다(왼쪽). 1977년 6월23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김형욱의 의회 청문회 증언을 컷과 함께 자세히 보도했다(오른쪽).
본보는 코리아 게이트에 관한 안홍균 씨의 증언을 기획 시리즈로 연재한다. 안 씨는 이번 증언을 통해 코리아 게이트를 둘러싼 한미 간의 숨막혔던 긴장과 갈등의 역사적 시간들을 재구성할 예정이다. 또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동선, 김형욱, 김한조와 김상근, 손호영 등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에 관한 숨은 스토리와 에피소드들도 소개한다.
-김형욱 성명서의 요지
그 시각, 세계가 KCIA의 총책이었던 김형욱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김형욱의 성명서(증언록) 요지는 크게 네 가지였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과 중정 부장 시절 겪은 공화당 정권의 실상, 김대중 납치사건과 박동선 스캔들의 내막, 주한미군 철수 반대가 그 내용이었다.
김형욱은 자신이 박정희와 5.16 혁명을 했으며 그것은 옳은 일을 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박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도왔지만 더 이상 집권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도운 것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는 자신이 중정부장에서 물러난 후부터 박 대통령이 인권을 탄압하고 독재를 했으며 박동선 사건 같은 국가적 수치 행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또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회복이 자기 인생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김형욱은 박정희 시대의 불행에 대한 과오와 책임에서 발을 빼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마치 민주투사인 양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그의 뻔뻔함은 자신이 부장으로 재임했던 1963년-69년 사이에는 반민주 행위가 없었으며 오히려 학생 데모를 보호했다고 항변하는데서 극에 달했다.
-“중정부장 권력, 대통령 능가”
흥미로운 토설(吐說)도 있었다. 그는 미 의원들에게 “난 중정 부장으로서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권력을 가졌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대통령보다 더 강한 권력을 행사할 정도였다고 암시했다. 그러면서 중정의 권력이 너무 커서 수사권과 구속권을 축소시키고 일부 권력을 검찰에 넘겼다고 했다. 박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의 위상과 가공할 힘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김형욱은 자신이 ‘반공투쟁’에 앞장서왔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 결과 자신이 ‘미스터 안티 코뮤니스트(Anti Communist)’란 별명도 얻었다고 자랑했다.
그는 주한미군 철수 반대 주장도 폈다.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면 한반도에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정일권 총리가 박동선 소개
김형욱은 의회 증언의 핵심사안인 박동선 스캔들에 대해서도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가 박동선을 처음 알게 된 건 부장 재임 시에 김현철 주미대사의 연락 때문이었다. 박동선이 자신을 주미대사라 떠벌리고 다니며 또 박 대통령의 친척이란 설을 퍼트리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박동선이 서울에 왔을 때 잡아넣어 조사해보니 박 대통령과 종씨이긴 하나 자신이 대사란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얼마 뒤 정일권 총리로부터 연락이 와 가보니 그 자리에 박동선도 있었다고 한다. 정 총리가 김 부장과 박동선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박동선은 워싱턴의 거물들을 많이 알고 있으며 한국의 이익을 위해 일할 사람이오.”
미 의원들의 관심의 초점은 박동선과 한국 정부와의 관련성이었다. 즉 그가 한국 정부의 에이전트였나 하는 것이었다. 김형욱의 답변은 좀 모호했다.
그에 따르면 박동선은 그 후 김형욱의 사무실로 찾아와 청을 넣었다고 한다.
“워싱턴에서 조지타운클럽을 운영하려 합니다. 중국계 로비스트인 안나 셰놀트처럼 대미 로비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경영난에다 돈도 모자랍니다. 제가 갖고 있는 한국 돈을 달러로 바꾸고 싶습니다.”
안나 셰놀트는 장개석 정권을 위해 소위 ‘차이나 로비’를 한 여자로 박동선을 미 사교계에 데뷔시킨 인물이었다. 김형욱은 비서실장을 시켜 암시장에서 10만 달러를 바꿔 외교파우치로 박동선에게 전했다. 그러자 박은 또 다른 부탁을 했다고 한다.
“미국 은행에서 융자를 받고 싶습니다. 한국정부가 미 은행에 예치한 돈을 내 은행으로 정기예치해주면 그걸로 융자를 받을 수 있으니 그렇게 해주십시오.”
-조지타운클럽 탄생의 비밀
통역을 하는데 혼란이 왔다. 돈 예치해서 어찌한다는 의미가 모호해서 주춤하니 김재현이 “담보”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담보 제공”이란 표현을 썼는데 다음날 대사관에서는 프레이저위원회에 “한국 정부가 담보를 제공한 게 없었다”고 항의했다. 걱정을 하던 차에 프레이저위에서 “김형욱이 담보라고 이야기한 건 아니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나중에 보니 한국 정부는 박동선의 거래 은행계좌에 300만 달러를 예치시켰고 박은 그 덕에 융자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 정부 돈이 박동선 계좌로 들어간 것은 박이 에이전트로 보일 수도 있는 대목이었다.
이에 대해 김형욱은 “중정 부장이 아니라 개인으로 지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프레이저위는 “왜 재무장관이 안 하고 당신이 했느냐?”고 물었다. 김은 “내 권한으로 해준 것이다. 그만큼 중정의 힘은 셌다”고 으스댔다.
코리아게이트의 무대가 된 워싱턴의 조지타운클럽은 한국 중정의 강력한 지원이란 비밀을 간직하고 탄생한 것이다.
-쌀 수출 독점권의 내막
미국의 쌀 수입과 관련된 중개 독점권이 박동선에게 제공된 내막도 공개됐다. 박동선과 코넬리어스 갤러거, 리처드 핸나 두 하원의원이 김형욱을 찾아왔다고 한다.
“한국이 미국의 원조를 받아 구매하는 쌀 중개 커미션을 제게 주면 그 수익금으로 대미 로비를 할 수 있습니다.”
박동선의 청을 들은 김형욱은 조달청장에 “미국 쌀 수출상들에게 박동선을 판매 에이전트로 써줄 것을 요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셀러인 미국의 미곡상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쌀을 파는 자신들이 세일즈 에이전트를 임명하는 것이라고 제동을 건 것이다.
그러자 조달청장은 “박동선을 안 쓰면 다른데서 쌀을 구매하겠다”는 정부 공문을 보냈다. 결국 미국 쌀 수출의 독점적 중개권이 박동선으로 넘어갔다. 박동선은 미국의 쌀 수출 중개권을 독점하면서 커미션으로 8-900만 달러를 챙겼다.
-국회의원 김형욱 찾아온 박동선
권력의 세계는 오묘한 것이었다. 특혜와 비호를 제공하던 파워에 틈이 생기면 또 다른 권력이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김형욱이 부장에서 전격 해임된 후인 1970년 말부터 72년 3월까지 박동선은 대한 쌀 수출 독점 중개권을 잃었다.
1971년 당시 김형욱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이었다. 돈방석 위에서 내려온 박동선이 김을 찾아왔다.
“제가 받아야 할, 미 의원 20여명에 나눠주기로 된 커미션을 박종규와 그 부하들이 뺐어갔습니다.”
박의 하소연을 들은 김형욱은 정일권 총리와 이후락 중정부장을 통해 박동선의 ‘복직’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리고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과도 잘 이야기해 박동선이 쌀 중개권을 다시 맡게 됐다고 증언했다.
미 의원들이 얽힌 커미션 증언은 휘발성이 큰 사안이었다. 청문회의 의원들은 이후락 중정부장이 작성했다는 20명의 의원 명단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김형욱은 “그 리스트는 소각해 없다”고 답변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성명서 낭독이 끝나고 점심 후 오후 2시10분에 다시 속개된 청문회에서는 의원들과 김형욱 간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김한조, 김상근에 대한 질문도 나왔지만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미 의원들의 관심도 지대했다. 김형욱이 DJ 납치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던 이야기를 할 때였다.
그는 사건 후에 일본 동경으로 가서 납치에 관여한 옛 중정 부하들을 만나 전모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어 김재권 주일 공사도 만났으며 그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납치사건의 진상을 캐내려 했으며 김재권의 푸념도 들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다시 ‘오역 사건’이 터졌다. 앞뒤가 연결되는 설명이 없다보니 김형욱이 일본에서 김재권을 만난 것으로 내가 통역한 것이다.
김재권은 본명이 김기완(金基完)으로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의 KCIA 공사였다. 1973년 8월 DJ 납치공작을 동경 현지에서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납치사건이 실패로 끝난 후 가족들을 미국으로 먼저 보낸 후 자신도 도미했다.
나중에 보니 김형욱이 미국 LA에 와 있던 김재권의 집에서 만난 것이었다. 한국말의 모호성 때문에 오역을 한 것이었다.
김형욱의 증언을 마땅찮게 본 일본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다음 날 관방장관은 “김형욱과 김재권 공사가 동시에 일본에 체류한 적이 없다”고 발표했다. 일본 언론들도 이를 ‘중대 오역’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청문회장의 시계바늘은 어느덧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모두 6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나는 그 역사적 시간의 무대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조차 실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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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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