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와 문학에 대해 알고 싶은데 영어로 된 책이 너무 없어요.”
세르게이가 말했다. 세르게이는 내 사촌 여동생, 수민이와 결혼한 러시아계 미국인이다. 수민은 작년 가을 한국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나는 참석하지 못해 이제야 그를 만나게 되었다. 뉴욕에 사는 그들은 워싱턴의 봄 축제, 벚꽃도 볼 겸 내려와 내 집에 하룻밤 머물렀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열 살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유엔으로 파견 나온 아버지를 따라 뉴욕에 오게 된 그는 대화를 나눌 많은 소재를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정체성에 대해 먼저 물었다. 러시아인이면서 미국인인 두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한국인이면서 미국인이 된 나의 고군분투를 언급하면서.
그가 미국으로 올 때 그의 나라는 소비에트 연방이었다. 아버지가 소연방 공무원으로 파견나와 있는 사이 나라가 쪼개지고 러시아가 되었는데 돌아갈 정부 부처가 모두 와해된 상황에 유엔에서 영구직을 제안 받은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 남게 되었다.
미국에 살아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러시아어로 수업을 하는 러시아인 국제학교에 다닌 그는 자신이 러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 확고했다. 미국에 살며 미국 직장을 다니니 미국인이기도 한데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외국에 나갔을 때 더 분명하다며 자신이 일본에 살았을 때 경험을 나눴다. 일본인들은 영어를 하는 백인은 모두 미국인으로 여기고 러시아인으로서의 자신에겐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미국인으로만 받아들이더라고 했다.
문학을 전공하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그는 역사와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청년 시절 일본 교토에 머물며 일본문학에 매료된 터라 수민을 알고부터는 한국 역사와 문학에 관한 책을 찾는데 영어로 된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책을 많이 안 읽는다고 들었는데 한국은 전통적으로 문학에 관심이 없는가, 일본은 문학을 중시하고 아름다운 글도 많은데, 일제시대를 통해 일본문학의 영향을 받았느냐 등을 그는 물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논리적 변론을 했다.
일본에 비해 한국은 서양문명을 늦게 받아들였고, 이후 한 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의 절반은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으로 영어권에 한국을 알릴 글을 쓴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웃 나라인 일본과 중국에 관한 영어서적이 많은 것은 그들의 영어권과의 교류가 훨씬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적으로 그들을 알아야만 하는 영어권의 필요도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전쟁 후 남북이 나뉘어 이념전쟁을 하느라 훌륭한 20세기 초 작가들 중 상당수는 월북 혹은 사상적 이유로 억압되었다가 80년대 말에야 해금되었다. 그 이전에 교육받은 나와 같은 세대는 이들 작가와 작품을 모른 채 성장했고, 아마도 북한에서는 자유로운 정신의 예술가인 문학가들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슬픈 현실에 죽어갔을 것이다. 남북 분단은 문학 또한 단절시킨 셈이다.
또 다른 단절은 언어에도 있다. 조선시대까지 많은 문학은 한자로 쓰였는데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은 한자를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아 옛 문헌들을 읽을 수 없다. 또한, 생존이 우선이던 근현대 한국에서 부모들은 자녀가 의사, 엔지니어, 변호사 등이 되길 바랐고 유학이나 이민으로 영어권에 정착한 한인들은 자신의 역사와 문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다음 날 세르게이와 수민이 떠날 때, 영문판인 한 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와 고은 시인 모음집을 건네주며 말했다. “미주한인 이민진 작가가 쓴 영문소설 <파친코>라는 책도 좋다는데 난 아직 못 봤어. 종종 한국 작가나 한국에 대한 영문 글이 나오면 알려줄게. 어쩌면 자네처럼 역사와 문학을 좋아하는 미국인이면서 한국인을 사랑하게 된 작가에게 신이 주신 사명이 있을지도 모르지.”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가는 세르게이와 수민의 뒤로 벚꽃이 흩날리는 길에 햇살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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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정 금융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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