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나고 중학생이던 나는 대전 공설시장에 나가 양키 물건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하루는 물건을 사러 미군 제1군단이 주둔해 있던 동네로 가보니 그날 부대가 이동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맨 앞에 있는 지프 차로 다가가 미군 장교에게 말을 걸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배운 짧은 영어 단어를 외워보았다.
“아이 유우어 하우스보이 오케이?”
그러자 키다리 양키 아저씨는 내 두 눈을 한참 꼼꼼히 들여다보더니 차에서 내리면서 자기 지프 차 뒷좌석으로 올라타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미군부대를 따라 다니기 시작했다.
미군 장교들과 사병들의 구두도 열심히 닦고 여러 가지 일들을 부지런히 하다 보니 귀여움을 받기 시작했다. 미군 장사병들이 시도 때도 없이 주는 초콜릿이며 껌, 과자 등 별의별 것들을 나는 하나도 먹지 않고 다 모았다가 어머니께 갖다 드렸다.
3.8선 이북으로 넘어갔던 부대가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며, 동두천을 거쳐 서울로 이동했다. 미군 부대가 성동중학교 자리에 주둔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할 일을 다 해놓고 ‘동부 훈육소’라는 중학교에 다녔다. 다시 부대가 영등포로 이동해 영등포종합중학교를 다녔다.
나를 자기의 하우스보이로 삼은 이 부대 사령관 키다리 양키 아저씨의 계급은 대령이었다. 그는 고전 서양 음악을 즐겨 들었다. 사령관의 취향을 따라 나도 클래식에 빠져들었다.
“네가 음악을 공부하겠다면 뉴욕의 줄리아드음대에 꼭 보내 주마.”
얼마 후, 제 친자식처럼 나를 사랑해주던 사령관이 한국에서의 근무기한을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가슴이 허전해지면서 뭔지 모를 불안에 휩싸여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사령관이 나를 찾았다. “난 너를 내 친아들처럼 생각한단다. 나와 함께 미국으로 네가 가겠다면 난 너를 내 양자로 입양을 해 공부를 시켜주겠다. 네 생각은 어떠냐?”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께 물어봐야 해요.”
다음날, 나는 대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맥이 탁 풀렸다. 차마 미국에 가게 되었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국에 가는 걸 어머니가 반대하셔요.”
나는 사령관에게 거짓말을 내뱉고 나자 가슴이 뭉클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사령관이 벌떡 일어나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한참 누군가와 통화 한 사령관은 내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그래, 한국에서 잘 지내라. 잘 아는 친구에게 널 부탁했다.”
사령관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를 맡아주기로 한 사람은 CAC (유엔의 한국원조기구) 사령관으로 그도 미육군 대령이었다. 이들의 숙소가 서대전에 있었다. 이 부사령관의 배려로 나는 대전의 피난종합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도 나를 무척 사랑하고 귀여워해 주었다. 미군장교클럽에 나를 데리고 가 테이블 위에 세워놓고 영어로 연설을 시키기도 했다.
“꼬마야, 내가 영국으로 돌아갈 때 나와 함께 가자. 너를 옥스퍼드 대학에 보내 줄 수 있어.”
부사령관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러던 어느날, 부사령관이 쓰러졌다. 부사령관은 술과 담배를 많이 해서인지 귀국 날짜를 육개월 앞두고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서울로 올라와 경복고등학교에 복교했다.
시간은 흘러 나는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노년이 된 나는 어려서부터 주문 외듯 한 나의 시 ‘사슴 노래'를 낭송한다.
“우리 삶은 꿈이어라 / 꿈이어라 꿈이어라 / 우리 삶은 꿈이어라 (중략) 우리 삶은 꿈이기에 / 꿈인 대로 좋으리라 / 우리 삶 꿈 아니라면 / 그 어찌 사나운 짐승한테 / 갈가리 찢기우는 사슴의 / 슬픔과 아픔을 차마 견딜 수 있을까/(중략) 우리 서로 사랑하는 / 가슴이 준 말 /‘사슴’이 되어라.”
<
이태상/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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