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약사들 다가백신ㆍ혼합백신 경쟁
▶ 독감 4가·폐렴구균 30가 백신 등
▶ 가수 클수록 예방 병원체 많지만
▶ 항원 간 간섭에 가수 늘리기 한계
▶ 코로나 때 mRNA 기술 상용화로
▶ 코로나+독감+RSV 혼합백신 등
▶ 예방 시급한 백신 선택 개발 가능

한 의료기관에서 의료인이 폐렴구균 백신 주사를 놓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올해 맞을 독감(인플루엔자) 백신은 작년처럼 4가가 아닌 3가로 바뀐다. 예방 범위가 더 적은 백신으로 되돌아가는 건 처음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야마가타 계통의 바이러스가 더 이상 유행하지 않아 3가로 충분히 예방이 가능하다고 권고했기 때문이다. 환자 입장에서야 더 비싼 4가를 맞지 않아도 되니 환영할 만하지만, 많은 돈을 들여 다가(多價)백신을 개발한 제약사는 난감해졌다. 통상 백신은 가수가 높을수록 더 좋은 제품이라는 인식이 있다. 백신에서 ‘몇가’라고 표기된 숫자는 항원의 개수를 나타낸다. 숫자가 클수록 예방할 수 있는 병원체가 많다는 뜻이다. 20가가 넘는 백신도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기점으로 백신 기술이 ‘퀀텀점프’를 한 가운데, 서로 다른 여러 병을 한번에 예방하는 이른바 ‘만능백신’이 나올 거란 기대도 있다. 물론 현실적으론 만만치 않다.
▲독감 4가, 자궁경부암 9가, 폐렴구균 30가백신은 안전하게 설계한 항원(세균, 바이러스 등)을 몸속에 넣어 병을 막아낼 수 있는 항체를 미리 만들게 하는 약이다. 백신에 다양한 항원을 담으면 그만큼 다양한 항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 제약사들은 그래서 가수를 늘린 다가백신이나 여러 종류의 항원을 함께 담은 혼합백신 개발로 기술 차별화를 꾀한다.
경쟁이 가장 치열한 다가백신은 폐렴구균이다. 2023년 6조~7조 원 규모였던 폐렴구균 백신 시장은 2030년 15조 원 이상(리서치앤마켓 기준)으로 성장이 예상된다. 폐렴구균을 일으키는 균 종류는 90개 이상이 밝혀졌다. 일부 균만 예방하는 백신을 맞으면 다른 균엔 감염을 피하기 어렵다. 최근까지 글로벌 제약사 화이자가 13가 백신으로 세계 폐렴구균 시장을 주도해왔다.
그러다 지난해 머크(MSD)가 15가 백신을 출시했고, 화이자가 다시 20가 백신을 내놓았다. 머크는 지난해 21가 폐렴구균 백신을 미국 식품의약국(FDA)로부터 승인받았고, 사노피와 SK바이오사이언스도 21가 백신을 2028~29년 출시한다는 목표다.
자궁경부암(사람유두종바이러스) 백신은 머크가 9가 제품을 개발했고, 화이자와 GSK는 수막구균 5가 백신을 상용화했다. 신생아와 영·유아에게 맞혀야 하는 백일해, 소아마비, 디프테리아, 파상풍, B형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 B형 간염의 6가지 백신을 한 제품으로 만든 6가 혼합백신은 올해부터 국가예방접종에도 도입됐다. 마치 반도체 시장의 메모리 적층 경쟁 속도전을 방불케 한다.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방식으로 제조된 화이자(왼쪽)와 모더나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로이터]
▲코로나+독감+RSV 혼합백신 임상시험 중문제는 항원을 약화시키거나 불활성화해 백신을 만드는 기존 기술로는 항원을 무제한 늘릴 수 없다는 점이다. 여러 항원을 혼합해 넣을 때 항원 간 화학적 안정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서다. 일정 수준 이상의 약효를 내려면 항원에 보조제도 조합해 넣어야 하는데, 항원마다 필요한 보조제가 달라 이들끼리 서로의 작용을 방해할(간섭) 가능성이 크다. 업계에선 이런 기술적 한계를 넘기 위한 시도가 이어져왔다. 가령 복수의 항원을 서로 연결하고 완충제를 추가해 안정화하거나, 항원이 몸에 들어가 항체를 잘 형성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면역조절제를 넣는 식이다.
그러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완전히 판을 바꿨다.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이 등장한 것이다. 당초 상용화까지 수년은 더 걸릴 거라 관측됐던 기술이었으나, 국제 보건 비상사태 속에 긴급히 출시됐다. mRNA 백신은 기존 백신 기술들과 비교해 개발 속도가 빠르면서도 훨씬 더 많은 항원을 담을 수 있는 게 강점이다.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반드시 백신 접종이 필요한 감염병이라도 항원 간 간섭, 사회적 비용 등으로 항원을 많이 혼합하기 어려웠던 문제를 mRNA 백신이 해결할 수 있게 됐다”며 “mRNA 플랫폼은 백신 개발에 혁신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과거엔 기술적으로 가수를 높이거나 혼합이 가능한 것 위주로 백신을 만들었다면, 이젠 정말 예방이 시급한 병의 백신을 선택해 개발할 수 있다는 얘기다.
▲mRNA 백신 플랫폼 기술을 확보
한 제약사들은 미래에 닥칠지 모를 ‘멀티데믹’(감염병 복합 유행) 상황을 대비해 혼합백신 상용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화이자와 모더나는 독감과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모두 예방하는 혼합백신을 놓고 경쟁 중이다. 둘 다 임상시험 마지막 단계인 3상에 와 있다. 모더나는 지난해엔 4,000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에서 혼합백신이 개별 백신보다 약효가 좋다는 결과를 내놓았고,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까지 합친 3종의 감염병에 대한 혼합백신도 임상 1상에 돌입했다.
모든 병 예방 ‘범용백신’ 개발 위해
정부 자금 투입, 기반 기술 갖춰야
▲“백신은 곧 국가 안보... 기반 기술 갖춰야”mRNA 플랫폼이 아무리 훌륭해도 세상 모든 항원을 욱여담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든 병을 예방하는 궁극의 ‘범용백신’에 다가가기 위해 제약사들은 다양한 기술 혁신을 이어가고 있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코로나19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에 공통적인 항원을 발굴해 이들을 모두 예방하는 감염병 범용백신을 개발 중이다. 3가·4가 구분이 필요 없는 독감 백신도 연구 단계다.
mRNA 외에 단백질 나노입자, 바이러스 벡터(운반체) 등도 새로운 백신 기술로 주목받는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명예교수는 “혼합백신을 포함한 여러 기술이 단계적으로 발달할 때 백신이 예방할 수 있는 영역도 확대된다”며 “에볼라,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뎅기열 등 아직 백신으로 예방되지 못하는 질병이 많기 때문에 각각 적합한 방식으로 개발을 유도한 뒤 혼합백신으로 합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투여 편의성도 중요하다. 주사가 아니라 코 안에 뿌리는 방식의 점막백신은 약효와 안정성 문제를 개선하며 대안 플랫폼으로 부상했다. 이준행 전남대 의대 미생물학교실 교수는 새로운 면역보조제와 항원 기술로 폐렴구균 점막백신을 만들어 동물실험을 했다. 그는 “더 쉽게 접종할 수 있는 차세대 백신으로 점막백신을 활용하게 될 것”이라며 “몸 속에 들어가지 않아 호흡기 감염병에서 특히 부작용이 적고 소량으로도 효율적인 면역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고 소개했다.
독감처럼 매년 맞지 않고 약효가 오래 가는 장기지속형 백신 개발도 물밑 경쟁이 한창이다. 이를 위해 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 크기의 미세 입자, 스스로 증폭하는 유전자(RNA)를 활용하는 등 새로운 접근법이 시도되고 있다.
백신은 건강한 사람이 맞는 의약품이라 항암제나 희귀질환 치료제에 비해 개발 속도가 느린 편이다. 면역반응을 확인하는 데 오래 걸리고 임상에 투입되는 인원과 비용도 엄청나다. 각국 보건정책에 따라 갑작스럽게 수요가 줄어들 수도 있어 시장 전략을 짜기도 쉽지 않다.
김우주 교수는 “결국 백신은 영리 목적보다는 공중보건과 안보 차원에서 중장기적으로 정부가 공적 자금을 투입해 기반 기술을 갖춰야 한다”며 “활용성이 큰 혼합백신이나 궁극의 범용백신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개발사가 실패를 감당할 수 있도록 정책 자금이 마중물이 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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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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