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질랜드 미술관…낯선 곳에서 되살아나는 오래된 나
3월의 찬비, 4월의 햇살 속을 걷다
무엇을 했느냐 보다 왜 했느냐가 인생에서는 더 중요하다. 의도와 상관없이 벌어진 결과가 뜻밖의 축복이 되기도 하고, 깊은 상처가 되기도 하며,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에겐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뜻하지 않은 순간에 가장 깊은 깨달음을 안겨준다.
3월의 찬비가 그치고 4월의 햇살이 스며드는 어느 날, 나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사람은 비가 온 뒤에야 맑음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 궂은 비가 지나고 맑게 갠 4월의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미국 여아들 이름에 ‘April’이 많은 이유도 어쩌면 이 상쾌한 감정 때문일까? 뉴질랜드의 하늘은 유독 아름다웠다. 그 하늘 아래 흘러가는 흰 구름은 지나간 먹구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젊은 시절, 나는 ‘얻음’에 목숨을 걸었고, 그것이 곧 ‘잃음’으로 돌아오리라 곤 상상하지 못했다. 욕망은 늘 비교와 갈등을 동반하며, 성취는 때로 외로움을 불러온다. 인생은 역설적이다. 어느 날 내려놓기 시작하면서 나는 평온해졌고, 주위 사람들도 부드러워졌다. 낯선 나라, 낯선 거리, 남반구의 계절 속에서 나는 과거의 나를 불쑥 마주하게 되었다.
음악 속에서 깨어나는 첫 깨달음
중학교 시절, 라디오에서 들려온 The House of the Rising Sun. 그 소름 돋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수가 흑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LP 커버에 등장한 사람은 수줍고 선한 얼굴의 백인 청년들(Animals)이었다. 그 순간, 나는 세상은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단정할 수 없다는 진리를 처음으로 배웠다.
이후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서울에서 연탄과 디젤의 냄새를 맡으며 자란 나에게, 미국의 맑은 하늘과 푸른 산천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교과서에선 대한민국이 가장 맑은 하늘을 가졌다고 배웠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 첫 미국 봄날의 풍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미국에 비해 뉴질랜드는 더 완벽한 청정구역이다.
기억이라는 소금비
기억난다. 아버지를 따라 처음 간 스미소니언 박물관. 무료 입장과 전시물 대부분이 기부된 것이라는 설명에 옆에 있던 어른이 조용히 말했다. “자식이 없나 보지…” 그 시절엔 기부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 ‘좋은 건 자식에게’가 당연했던 시대였다. 아버님은 아이들 앞에서 이상한 소리한다며 그 친구분과 그날 크게 다투셨다. 미국에 오셔서 큰 성공을 이루지 못했지만 아버님은 큰 이상속에 살다 가셨다. 이러한 기억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기억은 바닷물의 소금과 같다. 우리를 보존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된다. 소금비가 내리면 생명은 멸한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너무 많으면 삶을 무겁게 한다. 아내는 그래서 사진을 잘 찍지 않는다. 기억은 렌즈가 아닌 머리와 가슴에 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오세아니아 여행은 그런 여행이다. 머리로, 마음으로 기록되는 여정이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아내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로 싸우는 일이 없다. 단, 내가 가끔 소금비를 뿌릴 때를 제외하고는.
‘한’이 많은 한인들
기억력이 좋은 것은 오히려 행복한 삶에 방해가 된다. 한인들에게 ‘한’이 많은 이유는 좋지 않은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기억은 대부분 스스로 만든 것이기도 하다. 뉴질랜드는 영국인들이 원주민의 땅을 빼앗아 건설한 나라다. 이들은 마오리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지만, 백인들이 아무리 잘해주어도 원주민들의 피에 흐르는 쓴 소금기를 제거할 수는 없어 보였다.
오클랜드 도심, 한 경비원이 유모차를 끄는 원주민 여성을 세우고 수색을 하자, 그 여성은 경비원의 무전기를 빼앗아 도로에 던지고는 고성을 지르며 유유히 사라졌다. 주위의 백인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뉴질랜드 원주민은 전체 인구의 약 10%를 차지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변방에서 중심을 발견하다
나는 뉴질랜드 여러 도시의 미술관에서 그 수준과 깊이에 감탄했다. 생소한 작가들의 작품에도 중심의 진동이 있었고, 변방이 중심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역사에서 몽골,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그리고 현재의 미국까지 모두 한때는 변방이었다. 오늘날 K-Culture의 열풍 또한 변방의 목소리가 중심을 흔든 대표적인 예다. 예술의 중심은 파리, 런던, 뉴욕이라 하지만, 진정한 예술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감수성을 일깨워주는 그 장소가 곧 예술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기억에 남을 순간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순간은 무엇일까? 생일, 명절? 아내는 말한다. “부질없어. 행복했던 순간만 기억하면 돼.” 그녀는 사진보다 ‘감각의 기록’을 중시한다. 그래서 여행 중에도 사진을 잘 찍지 않는다.
기억은 소금처럼, 적당해야 한다. 너무 많으면 짜고 무겁다. 사람이 환생하더라도 과거의 기억을 안고 태어나서는 안 되는 이유다. 지나친 기억은 삶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배려와 여유-자선과 예술의 교차점
오클랜드 미술관 정문에는 ‘The Robertson Gift’전시를 알리는 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뉴욕 출신 줄리안 로버트슨 부부가 기증한 유럽 모더니즘 대표작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피카소, 고갱, 세잔, 달리, 마티스 등, 한 점만 있어도 미술관의 수준이 높아질 작품들이었다.
줄리안 로버트슨은 1978년 뉴질랜드를 여행하며 이 땅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미국의 헤지펀드 거물로 성공한 뒤 평생 맨해튼 펜하우스에 수집한 컬렉션을 뉴질랜드에 기증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단지 작품이 아니라, 나눔의 철학이었다.
낯선 곳에서, 오래된 나를 마주하다
나는 피카소의 ‘망사 모자를 쓴 여인’ 앞에 서서 오래 바라보았다. 조각조각의 색과 면으로 구성된 그 얼굴은, 인생의 조각난 기억들과 닮아 있었다. 어떻게, 어디 을 바라 봄에 따라 인생의 결도 달라진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면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뉴욕을 향해 떠난다. 백남준 선생 역시 뉴욕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정치, 행정, 외교에 뜻이 있다면 워싱턴이 답니다.
‘어디에 사느냐’는 단순한 지리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감수성을 어떻게 흔드는가의 문제이고, 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뉴질랜드의 하늘 아래에서 오래된 나를 꺼내어 본다.
삶은 소금이 빠진 비처럼 새롭게 적셔야 한다.
지나간 기억이 우리를 짓누를 때, 우리는 그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하늘 아래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남기고 떠날 것인가도 고민해보아야 한다.
이제 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고, 다시 길을 나선다.
<제프 안 AKI 연구원 원장>
문의 Jahn20@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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