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사라진 반쪽(The Vanishing Half)>만으로는 어떤 이야기인지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다. 처음에 추리 소설이 아닐까 했지만, 이 작품은 정체성과 선택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였다.
이 소설은 2020년 뉴욕 타임스 선정 ‘최고의 책 10선’에 올랐고, 작가 브리트 베네트(Brit Bennett)는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출신이다. 그 영향인지 작품에는 L.A.를 배경으로 한 장면이 자주 등장하고, 한인타운의 박씨 아저씨, 송씨 아저씨 같은 인물도 언뜻 나타나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소설은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밝은 피부를 가진 흑인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은 흑인의 삶을, 다른 한 명은 백인의 삶을 선택한다. 그 선택은 두 사람의 삶을 극적으로 갈라놓고, 그들의 딸들은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며 각자의 방식으로 삶과 정체성을 마주하게 된다. 소설은 피부색뿐 아니라 성 정체성에 따라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정체성과 선택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루이지애나의 한 작은 마을에는 겉모습은 백인 같지만, 흑인의 혈통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들은 백인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면서도 흑인으로 대우받는 것 역시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공동체를 만든다.
쌍둥이 자매는 비록 성격은 다르지만, 가난 탓에 학교를 중단하고 부잣집 하녀로 일하게 된다. 어린 시절, 백인에게 이유 없이 아버지가 살해당한 사건은 자매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는다. 결국 16살이 되던 해, 두 사람은 과거를 뒤로한 채 마을을 떠난다.
동생 스텔라는 백인의 삶을 선택한다. 자신에게 흑인의 피가 흐른다는 걸 숨기고 백인과 결혼한다. 그녀는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지만, 임신 후, 아이가 어두운 피부색으로 태어날까 봐 불안해한다. 다행히 딸 케네디는 백인의 외모로 태어나고, 흑인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란다.
언니 데지레는 흑인 검사와 결혼하지만, 남편은 그녀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그녀는 딸 주드와 함께 고향으로 도망친다.
주드는 어두운 피부색으로 인해 사회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지만, 외로움을 견디며 달리기를 시작하고, 이를 계기로 장학금을 받아 L.A.의 대학에 진학한다. 그곳에서 주드는 성전환을 준비하는 리스를 만나 연인이 되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며 단단한 관계를 쌓아간다. 그 주변에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백인 사회에 동화된 스텔라는 점차 흑인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이 완전히 백인이라고 믿게 된다. 흑인을 혐오하는 이웃들의 시선과 분위기에 점점 물들어가며, 그녀는 과거를 숨긴 채 살아간다. 딸 케네디는 어머니에게 흑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자신까지 흑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언니 데지레는 결국 첫사랑과 재회해 도시로 나간다. 딸 주드는 차별을 온몸으로 겪으며 성장했고, 결국 의사가 되어 다양한 사회운동에도 참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매가 자란 고향 마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지도에서도 그 이름이 사라진다. 쌍둥이 자매는 각자 다른 길을 선택했고, 그 선택 속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냈다.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택했을 때, 변화는 비로소 삶에 뿌리내린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그리고 가장 힘든 상황에서도 어떻게 자유를 발견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 자신과 내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이라 해도 각자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하며, 누구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릴 적 자신을 ‘미국인’이라 말하곤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내가 아이들을 잘못 키운 건 아닐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드물지만,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되살아난다.
한국과 미국 사이, 그 어딘가에 서 있는 나. 나는 혹시, 아이들에게 내가 선택한 자리를 강요했던 건 아닐까?
<사라진 반쪽>은 선택하지 못한 정체성이 주는 억압과 상처,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이 주는 해방과 자유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
한 영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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