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를 시작하며…
시간은 역사다. 1903년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에 첫 발을 내디딘지 어느새 백년. ‘아메리칸 드림’이란 공통 분모속에 억척같이 살아온 한인 이민자들은 이제 남부럽지 않은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한인사회가 오늘을 맞이하기까지는 수많은 한인들과 단체들의 봉사와 희생이 있었다. 그러나 한인사회에는 이를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역사는 있는데, 기록이 없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지난 시간을 증언해 줄 주요 인사들이 고령으로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어 종합적인 이민사 정리를 더욱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도 커지고 있다. 주요 인물들과 단체들에 대한 재조명을 통한 한인사회의 지난 여정을 정리하기 위해 이번 연재를 마련했다.
유학생·초기이민 2세들 주축 첫 모임
한인센터-한인회-거류민회로 발전
71년 소니아석 회장 이후 본궤도 올라
“숱한 사연·공과 얼룩 타운의 역사”
■LA한인회
어느덧 불혹을 훌쩍 넘은 LA한인회. 28명의 회장을 선출하며 한인사회의 대표기관으로 자리를 잡아왔다. 창립 반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만큼 한인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치지 않는 크고 작은 불협화음은 한인사회 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과 기여를 해온 한인회 존재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1965년 8월15일 한국에서 온 미스코리아 김경숙(뒷줄 왼쪽 5번째)씨를 환영하기 위해 샌피드로 카브리오비치에 모인 한인들. 뒷줄 오른쪽 첫번째가 이경동씨, 그옆이 조용삼씨, 오른쪽 5번째가 김기수씨. 앞줄 맨오른쪽은 황규태씨.>
“각하, 돈이나 좀 주세요”
“돈은 뭐하게요”
1975년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 모금방문단의 일원으로 이학조 상의회장, 이민휘, 최희만, 배기생씨 등과 함께 청와대를 예방한 소니아 석(작고)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담하게도 한인회관 건립비용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고위각료들도 그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던 시절, 석 여사의 배포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박 대통령은 즉석에서 15만달러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LA한인회는 1965년 5월1일 200여명의 한인들이 모여 ‘남가주 한인회’란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LA의 한인인구는 수 천에 불과했고, 유학생들이 주류였다.
창립멤버로는 한국에서 유학와 1960년대 초반 UCLA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조용삼씨(작고), 육사교관 생활을 접고 1956년 텍사스 주립대로 유학왔던 이경동씨, 역시 유학생 출신으로 미국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나중에 연세대에서 강의를 했던 김하태(작고) 목사, 애국부인회 회장을 지낸 이화목(작고)씨, 고려대 출신으로 현재의 한인타운 인근에서 주유소를 운영했던 송영창씨(작고), 그리고 송씨의 처남으로 의사였던 김창하씨(작고), 그로서리 가게를 운영했던 유재신씨(작고) 등이 있었다. 또 이들과 뜻을 함께 했던 에스더 백씨와 오봉운씨가 있었으나 현재 소재와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당시 한인회의 설립목적은 이보다 3년 먼저 만들어졌던 ‘남가주 한인센터’를 지원하기 위한 성격이 더 강했다.
남가주 한인센터는 한인사회의 화합과 이민자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남가주에서 활동하던 국민회와 동지회, 애국부인회 등 독립운동 단체 회원들이 중심이 돼 조직됐다. 여기에는 초기이민 2세로 중가주 리들리에서 씨없는 복숭아를 만들어 부를 축적한 김호씨(작고)와 동지회 원로 송철씨(작고), 그리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남이자 영화배우였던 필립 안씨(작고) 등이 참여했다.
한인센터는 1963년 2525 버논 애비뉴에 7만달러를 주고 매입한 자체 건물이 있었으나, 재정난으로 융자금 상환이 어려워지자 결국 1967년 6월 매각하고 여기서 남은 4만달러는 ‘건물매입시에만 사용한다’는 조건속에 센터기금관리위원회로 넘겨진 뒤 나중에 현재의 한인회관 매입 때 종자돈이 된다.
회관매각은 한인센터와 한인회 통합의 계기가 돼 1968년 1월 ‘재미한인거류민회’란 명칭으로 마침내 본격적인 LA한인회 시대가 열리게 된다.
통합전 남가주 한인회 초대 회장이었던 조용삼씨는 다시 이 단체의 1대 회장으로 취임했으나 얼마되지 않아 한국 농업개발공사 고문으로 근무하기 위해 회장직을 사퇴하고 한국행에 올랐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채 돌아왔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회장 공석사태가 발생하자 이경동 부회장이 회장대행을 맡았는데, 이를 놓고 한인회 일각에서는 이경동씨를 정식 회장으로 인정해야 하는가를 놓고 현재까지도 이견이 이어지고 있다.
이후 2대 회장에 박규현 목사가, 이사장엔 이화목씨가 각각 선출됐고, 3대 회장은 김형일 목사가 맡는다.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아들인 김 목사는 지식이 풍부한데다 칼스테이트 계열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특히 김 목사는 논리가 넘치는 달변가로 웬만한 준비없이 김 목사와 언쟁을 벌였다간 십중팔구 완패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 후반은 한인들의 부의 축적이 이뤄지는 시기였고, 가발업이 효자 비즈니스였다.
김시면 14대 한인회장을 비롯해 권영달씨, USC를 졸업한 조규창씨 등이 가발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조씨는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1년 4대 회장 선거에서는 소니아 석(작고) 여사가 박준환 후보를 누르고 선출됐다. 석 여사는 최초의 여성 회장이었고, 그 기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걸’로 통했던 석 여사는 부동산업에 종사하면서 호탕하고 과감한 성격으로 남성들을 압도했으며, 타운 일에는 거의 대부분 관여할 정도로 활동가였다. 특히 타고난 배짱과 주류사회까지 뻗어 있는 폭넓은 인맥은 한인사회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그러나 석 여사는 이사진과의 불협화음으로 임기 3개월을 앞두고 자진 사퇴, 5인 대책위가 잔여 임기를 꾸려갔다. 석 여사의 아들 장기열씨는 지금도 타운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다.
1972년 5대 회장에 오른 조지 최씨는 한인 부동산 업계의 대부로 불린다. 그는 나중에 현재의 한인회관 건물을 매입하는데도 깊숙이 관여했으며, 1982년 한미은행이 설립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 1981년 윌셔와 로스모어에 위치한 현재의 총영사관저 매입 과정에서 자문을 맡기도 했다. 그는 한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굿사마리탄 병원 이사로 활약중이다.
성공한 이민 1세로 손꼽히는 최씨는 지금도 맥도널드에서 4달러짜리 식사를 즐길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해에 한인회는 단체명을 ‘재미 한인거류민회’에서 ‘남가주 한인회’로 개명한다.
최씨의 뒤를 이은 6대회장 김종식씨는 한국화약 집안출신이란 사실이 더 유명했다. 그는 또 회장직을 마친 뒤 귀국,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며 한인회장 출신 정치인 1호를 기록했다.
김씨의 정계진출은 이후 일부 후임 회장들이 한국정치 꿈을 지피는 시발점이 돼 김기성(9-10대), 이기명(17대), 김영태(21대), 장성길(22대)씨 등이 잇달아 한국정계를 두드렸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채 모두 LA로 돌아와야 했다. 또 27대 회장을 지낸 이용태씨와 28대인 남문기 현 회장도 한나라당을 등에 업고 정계진출을 모색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센터가 1963년 구입했던 자체 건물.>
<다음주 월요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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